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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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삶의 사용설명서를 뒤늦게 받아들였다.
ADHD와 APD를 진단 받은 개발자의 이야기
2025-04-13 22:51
나는 멀쩡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걸 깨달았을 때 이상하게도 안도했다. 평생을 “왜 이럴까?”라는 질문 속에 살았으니까. 정리되지 않는 책상, 자꾸 놓치는 약속, 자주 되묻는 대화, 산만함과 과도한 몰입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삶. 나만 그런 줄 알았고, 그건 단순한 성격 문제라고 생각했다. 더 노력해야 한다고, 더 철저해져야 한다고, 그렇게 스스로를 몰아세웠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모든 것의 이유를 들었다. 진단명 하나에 너무 많은 퍼즐이 맞춰지는 경험. 이 글은 그 경험의 기록이다. 제가 ADHD라뇨. APD는 또 뭔데요. 1. 처음으로 이상하다고 느낀 날 - ADHD를 의심하게 된 계기 🛤️ 그날도 기차를 놓쳤다 2024년 여름, 다이빙 동호회와 울릉도 여행을 가던 날이었다. 하필 그 날은 나의 팀 마지막 출근일이기도했다. 치워도, 치워도, 치워치지않는 자리 정리에 정신이 없었고, 결국 기차 시간이 촉박해져 3년간 함께한 팀원들에게 인사도 못 했으며, 끝끝내 유일한 포항행 SRT마저 놓쳐버렸다. 대전까지 이동해 겨우 KTX를 타긴 했지만, ‘복합열차’ 개념을 몰라서 호남으로 갈 뻔했고, 그 와중에 성심당 빵까지 놓고 내렸다. 한번에 갈 수 있지만 굳이 굳이 택시, SRT, KTX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서 도착한 포항역 “소연님 완전 ADHD인데” - 장난처럼 던진 누구가의 말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내가 대화 중 갑자기 다른 말을 한다거나, 방금 했던 말을 꼭 다시 반복하게끔 되묻는단다. 특히 친하게 지내던 OO님이 가장 흥분하며 말했다. “어쩐지 이상하다 생각했어!” - 내가 ADHD 환자임이 기정사실 마냥 확실시 되고 있었다. 😅 사실 검사도 몇개월동안 미루고 미루다 OO님이 하도 보채서 갔다. 🔄 놓치고 잊고 잃어버리는 나의 루틴 나도 안다. 매번 놓치고, 기억하지 못하고, 정리가 잘 안 되던 수많은 순간들. 난 첫인상으로 철두철미해 보인다는 말을 많이 듣지만, 내 친구들은 내가 그렇지 않다는 걸 잘 안다. 난 자주 지각하며, 자주 잊어버리고, 또 자주 잃어버린다. 길치가 아닌데도 잘못 된 길에 들고, 비행기는 3번쯤 놓쳤으며, 기차를 놓친 횟수는 셀 수도 없다. 물을 따를 땐 항상 흘리며, 이미 산 물건을 몇 번이고 또 사고, 물건을 제자리에 두지 못한다. 무엇이든 간에 적어놓지 않으면 꼭 기억해야 하는 것들도 기억하지 못한다. 이건 단순한 건망증이 아니라, 내 일상 자체의 반복 구조였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이 모든 게 당연해졌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니까’라는 체념 같은 것. 여러분들은 사가정에서 만나기로해놓고 삼각지에 간 말도 안 되는 경험이 있는가? 난 있다. 🕳 그래서 나는 더 꼼꼼했다 많은 것을 놓치기 때문에 나는 업무 중엔 최대한 많은 것을 기록하고 메모하며, 사소한 것까지 검토한다. 그 모습 덕택에 날 잘 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꼼꼼하다는 착각을 한다. 물론 일상생활 중에는 애로사항이 많지만 업무 중에는 오히려 ‘꼼꼼하다’는 피드백까지 받으니, 내 단점은 보완 가능하다는 생각을 해왔다. 철두철미해 보이는 나의 첫인상 (이 순간에도 뭔갈 잊어버리거나 잃어버렸음) 하지만 그날 울릉도에서 들었던 한 마디 이후, 처음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이게 단순한 성격이 아니라 진짜 문제일 수도 있는 걸까?’ 내가 그동안 ‘개성’이라며 넘겨온 수많은 행동들이 사실은 누군가에겐 ‘증상’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 그렇게, 나는 내 삶을 조금 더 진지하게 들여다보기로 했다. 이건 사소한 계기였지만, 내 인생에 있어 가장 큰 의심이었고, 동시에 가장 중요한 질문이었다. 그러니까 제 인생이 바나나 껍질 40배라고요? 2. 검사 과정 - ADHD는 어떻게 진단받을까? 🩺 문진 & 상담 의사 선생님의 대면 문진/상담으로는 너무나도 가볍게(?) ‘전형적인 ADHD’라는 소견을 받았다. 여기서 끝이 아니고, 본격적인 검사는 이 때부터 시작이다. 무려 두시간 가까이 머리에 뭘 쓰고 뇌파 검사, IQ 테스트, 집중력 테스트를 봤다. ADHD 검사가 이렇게 과학적이고 체계적일 줄 몰랐다. 정신과는 내 생각보다 하이테크했다(!) '삐빅- ADHD입니다.'하고 끝날 줄 알았나요? 저도요 🧠 뇌파검사 (EEG, Electroencephalography) ADHD의 뇌의 전기적 활동 패턴은 일반인과 다르기 때문에, ADHD 특유의 신경생리학적 특징을 확인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고 한다. ADHD 환자들은 Theta 파와 Beta 파의 비율을 의미하는 TBR이 일반적으로 높은편인데, 이는 멍함과 집중력 저하를 의미하며, 뇌의 각성 수준이 낮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걸 머리에 쓰고 뇌파를 검사한다. 내 이런 모습 아무한테도 안 보여주고싶은데, 왜인지 병원 로비에서 검사시킴.. 그런데 나는 이 뇌파검사에서 꽤 독특하게 나왔다. 여기에는 두가지에 소견이 있다. 첫번째는 내가 과잉형 ADHD라는 것. 일단 ADHD 판별에 가장 중요한 지표인 TBR 수치가 하위 5%가 나왔다. 이는 ADHD 양상과는 반대되는 패턴으로, 되려 내가 너무 지나친 각성 상태라고 했다. 특히 나는 고주파대역(Beta, High Beta, Gamma)가 다소 비정상적으로 활성화 되어있었는데, 이 또한 과잉 각성 상태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두번째로는 나의 이런 극단적인 양상이 감각 자극 처리의 불균형 때문이라는 것. 예컨대 청각 자극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떨어지기에, 이를 시각적 집중력으로 과보완하면서 전체적인 뇌파의 방향성이 왜곡된 것이라는 해석이었다. 뇌가 부족한 자원을 보완하기 위해 다른 영역을 과도하게 동원하게 되면서, 각종 수치들이 비정상적으로 하위 5% 혹은 상위 5%에 치중된 것이다. 이렇게까지 극단적일 필요 없잖아. 🧮 IQ 테스트 (Raven’s SPM, 유추능력 중심) 집중력보단 지능의 문제일 수 있으므로 지능 검사 혹은 IQ 테스트를 같이 한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이 검사에선 최고 수치인 ‘140 이상’이 나왔다. 의사 선생님은 이걸 특히 주목하셨는데, 학창 시절이나 사회생활에선 잘 해왔지만 생활 속 반복되는 실수가 계속되었다는 점 자체가 고기능 ADHD 환자에게 흔히 나타나는 양상이라고 했다. 수업 시간에 집중을 못 해도 벼락치기로 충분히 높은 성적을 냈고, 좋은 대학, 좋은 직업을 가지는데도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지능이 높을 수록 발견이 늦게 된다 한다. 그리고 또 다른 인사이트도 있었는데, 그래서 아마 나의 경우에도 성인이 되어서 ADHD가 생겼다기보다는, 어린 시절에 발견되었어야할 ADHD가 높은 지능에 가려져 뒤늦게 발견 된 케이스일 것이라고 의견을 주셨다. IQ 검사라는걸 말 안 해주셔서, ADHD 판별 검사인줄로만 알고 너무 어려워서 당황했다. 🎯 집중력 테스트 (CAT) ADHD를 판별하는 가장 중요한 테스트. 반응 속도나 오류율, 일관성 등을 체크하며 지속적 주의 집중 능력, 실수 빈도, 반응 일관성 등을 검증한다. 계속해서 변화되는 규칙을 찾아낸다거나, 특정 숫자가 나올 때마다 화면을 클릭하거나, 특정 소리가 나오면 화면을 클릭한다. 3이 들릴 때마다 클릭하기 - 사실 하면서도 내가 너무 못 하는게 보여서 무력감에 눈물이 핑 돌았다. 여기서도 뇌파검사와 마찬가지로 극단적인 결과가 나왔는데, 시각 집중력(Visual Span)에서는 상위 1%, 청각 집중력(Auditory CPT)에서는 하위 1%였다. 이 극단적인 양상을 통해 나는 단순히 집중을 못 하는 사람이 아니라, 감각 처리 능력의 불균형이라는 더 근본적인 문제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청각 자극에 대한 정보 처리가 지연되거나 누락되기 때문에, 나는 시각 정보에 더욱 의존하게 되고, 이것이 반복되면서 시각 자극 관련 뇌 영역이 과도하게 활성화된다. 동시에 청각 자극에 대해선 점점 더 무뎌지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그래도 꽤 재밌었던 변화하는 규칙 찾는 카드 게임 3. 검사 결과 - 진단명 하나에 맞춰진 퍼즐들 💥 [ADHD] 나는 멈추지 못 하는 ‘과잉 인간’이다. 나는 ADHD하면 ‘산만한 아이’정도를 떠올렸다. 그래서 내 얘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잘 깨어 있고, 오히려 과도하게 집중하고, 멈추지 못하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그러니 ‘집중을 못 하는 사람’이라는 말은 나와 맞지 않다고 여겨왔다. 히지만 나의 경우엔 ‘하이퍼포커스(hyper-focus)’와 ‘과잉계획’, ‘기록 강박’, ‘감정 반응의 민감성’ 같은 특성이 더 두드러졌다고 했다. 정신없이 일을 몰아서 처리하고, 하루 12시간을 넘게 일에 몰두하고, 머릿속에 열 개의 일을 동시에 떠올리고, 쉬고 있을 때도 조용히 쉴 수 없었다. 실제로 나는 주어진 업무가 많을수록 오히려 성과가 좋았다. 동시에 프로젝트를 세네 개 진행할 땐 집중력이 올라갔고, 일이 줄어들면 무기력해지며 주의가 흐트러졌다. 이건 ADHD 환자에게서 자주 나타나는 ‘과잉동기-탈진 루틴’이라고 한다. 몰아치듯 집중했다가 갑자기 방전되는 구조다. 그러니까 나는 가만히 못 있는 사람이 아니라, 멈추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저는 비빔, 아니 과잉 인간입니다. 🎧 [APD] 소리는 들리는데, 뇌에는 닿지 않는다 사실 ADHD 진단보다 더 충격적이었던 건, 청각 처리 능력에 대한 결과였다. 뇌파 검사와 집중력 테스트 모두 청각 자극 반응에서 유난히 낮은 수치를 기록했다. 하위 1%의 청각 정보 처리 능력. 뇌파 지수로도 청각 정보 전달 속도가 기준치의 절반 수준이었고, 그 마저도 인지력이 35%밖에 안 되었다. 내가 겪는 청각 관련 특징들 - 소음이 섞이면 대화 내용이 사라진다 - 말을 ‘다시’ 들어야 한다 - 가끔은 말은 들리는데, 의미가 뇌에 닿지 않는다 - 자막이 없으면 영화를 보지 못 한다. 실제로 시끄러운 공간에선 대화 내용을 거의 놓친다. 누군가 말을 하면, 이해하기까지 몇 초가 더 걸린다. 분명히 방금 들은 말인데도 ‘그게 무슨 말이지?’ 하며 머릿속을 맴돌다가 결국 다시 묻게 된다. 특히 말 전체의 문맥을 한 번에 받아들이지 못하고, 정보가 왜곡되거나 통째로 사라지기도 한다. 나는 그동안 이걸 산만함이나 건망증으로 착각해왔다. 이런 경험이 반복되다 보니, 난 ‘듣는 것’보다 ‘보는 것’에 의존하게 됐다. 예컨대 자막 없는 영화는 사실상 못 보기 때문에 보려는 시도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건 나의 ‘성격’이 아니라 뇌의 ‘처리 구조’ 문제였다. 이것이 바로 청각 처리 장애(APD, Auditory Processing Disorder)였다. 청력이 나쁜 것도, 귀가 아픈 것도 아니다. 소리는 들리지만, 그 안의 ‘정보’가 뇌에 닿지 않는 것. 그냥 매일이 이런 상황 🎯 [감각불균형] 무지성 몰빵 스탯의 기행 빌드 나는 청각 정보 처리능력에서 하위 1%가 나왔지만, 시각 정보 처리 능력에서는 상위 1%가 나왔다. 한쪽 감각의 결핍을, 다른 감각이 ‘과하게’ 보완하고 있다고 한다. 쉽게 말해, 나는 청각 정보를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듣고 있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인식하지 못하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다. 누가 방금 한 말을 다시 물어보게 되는 이유, 대화 중 자주 주제를 놓치는 이유는 다 여기에 있었다. 반면, 시각 자극에는 비정상적으로 민감하다. 뭔가를 보면 바로 파악하고, 기억에 잘 남는다. 숫자나 글자의 배열을 시각적으로 기억하는 능력은 비정상적으로(?) 높다. 실제로 나는 머릿속에 사진으로 저장하는 것처럼 특정한 것들을 굉장히 잘 기억한다. 이를테면 카드뒤집기 같은 거. 누가 스탯을 이렇게 몰빵으로 찍어요; 4. 되돌아보며 - 나는 나에게 장애가 있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 🧩 결핍을 덮은 능력 - 단점 덕에 발전한 장점 고등학생 때부터 나는 매일 아침 할 일을 적었고, 회의 중에도 요점을 메모했다. 사람들은 날 보고 ‘정리 잘한다’, ‘디테일하다’고 했지만, 나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잊어버리는 게 너무 많아서 그랬다. 메모, 기록, 정리, 문서화, 캘린더 관리 — 그러니까 나의 방식이라기보단 생존 그 자체였다. 그 시스템 덕분에 ‘꼼꼼한 사람’이라는 평판을 얻었고, 나도 사실은 그렇게 믿어왔다. 17살부터 지금까지 매일 아침 해야할 일을 적는 것이 10년이 넘도록 습관이 되었다. 🎭 결핍을 가린 가면 - 고지능이라는 외피 수업 내용이 전혀 뇌에 박히지 않고 있었지만, 성적이 좋으면 아무도 그 사실을 발견하지 못한다. IQ가 높거나 성과가 뛰어난 사람일수록, 이런 문제는 더 늦게 드러난다. 주변 사람들은 ‘잘하는데 뭐가 문제야’라고 하고, 본인도 ‘내가 문제인 줄 몰라서’ 방치하게 된다. 능력이 아니라, 결핍을 몰라서 생기는 문제. 나도 그랬다. 나 뿐 아니라, 성인 ADHD를 진단받은 대부분의 사람이 지능 때문에 어릴 적에 발견을 못 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좀 덜 떨어져도 티가 안 날 수 있지 🧱 결핍을 정체화한 오해 - ‘원래 그런 사람’이라는 착각 나는 내가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늘 피곤하고, 대화 중 자주 놓치고, 정리와 메모에 집착하는 것도 그냥 내 성격이라 믿었다. 예민하고 집중에 기복이 있는 건 그냥 “나는 그런 타입”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건 ‘원래의 나’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만들어진 나’였다는 걸 알지 못한 데서 비롯된다. 그건 내가 선택한 성격이 아니라, 적응을 위한 전략이었다. "제가 원래 말귀를 좀 못 알아먹어서요" 🏆 결핍을 감춘 성과 - 버티는 사람이 유능해 보이는 사회 우리는 늘 ‘버텨야 했다’. 그걸 ‘능력’이라 착각했고, 나 또한 남들보다 노력해야 가능한 상태를 ‘내 기본값’이라 믿었다. 모두가 각기의 힘든 상황 속에서도 노력을 하고 살아가는거라 믿었다. 성과가 결핍을 감췄고, 그 결핍은 너무 오랫동안 설명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이제 와서야 그 모든 ‘성과’는 나를 괴롭히던 결핍 위에 세워진 허약한 탑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우린 다들 버티라고 배워오지 않았는가 5. 진단 그 이후 - 달라진 것들 🔊 세상이 조용해지고, 말이 들리기 시작했다 약을 먹은 첫날, 정말 기이한 경험을 했다. 대화 중 상대가 한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게 그렇게 놀라운 일일 줄 몰랐다. 이전에는 매번 대화가 ‘들리는 듯 말듯’ 흘러가곤 했는데, 이제는 단어가 명확히 박히고, ‘생각의 소리’와 ‘외부의 소리’가 서로 뒤섞이지 않았다. 알 수 없는 기분에 펑펑 울었다. 이렇게 잘 들리는 거였다니, 이제까지 내가 정말 못 듣고 있었다니, 다른 사람들은 이러한 나의 불편함을 참아주고 있었다니, 그런 복잡한 마음 속에 정말이지 눈물만 나왔다. 약은 만능이 아니다. 잠시동안 집중이 좋아지는 ‘도구’일 뿐이다. 하지만 그 몇 시간 동안의 평온함은, 내가 평생 몰랐던 세계였다. ‘내게 맞는 리듬을 찾고 싶다’ 찾기 위해, 약은 그 리듬을 찾는 ‘보청기’ 같은 역할인 것이다. "이렇게 잘 들린다고?" 다른 사람들의 말이 모두 들리기 시작했다. 📖 진단은 낙인이 아니라, 나에 대한 설명서 진단을 받았다는 건 어떤 면에선 나를 규정짓는 일이었지만, 동시에 나를 해방시키는 일이기도 했다. 나는 늘 “왜 나는 이럴까?”라는 질문에 붙잡혀 있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해 “내가 부족해서”라고 답해왔다. 하지만 이제는 이유가 있다. 구조가 있다. 설명이 있다. 나는 그냥 그런 구조의 뇌를 가진 사람이었을 뿐이다. 그 사실은 나를 약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다정하게 만들었다. 나는 이제 나를 다그치지 않는다. 못했다는 이유로, 실수했다는 이유로, 끝까지 못 갔다는 이유로 나를 몰아붙이지 않는다. 나는 나를 이해하고 있고, 그 이해는 삶을 바꾸는 힘이 되었다. 진단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이제는 과거의 내가 이해된다. 무리하게 몰아붙이고, 스스로를 의심하고, 자책으로 무너졌던 그 많은 순간들이. 나는 부족하지 않았다. 다만 다른 구조였을 뿐이다. 그리고 그 구조를 아는 것만으로도 삶은 훨씬 다정해질 수 있다. 깔끔하고 명확한 제품 설명서 🤝 나의 부족함은 타인을 이해하는 문이 되었다 진단 이후, 내가 제일 크게 바뀐 건 타인을 대하는 방식이다. 예전엔 답답하게 느껴졌던 사람들—매번 회의만 요청하고 슬랙으로 기록을 남기지 않던 개발자, 문서를 읽으면 되는데 꼭 설명해달라던 누군가—그들을 이제는 조금 더 너그럽게 바라볼 수 있게 됐다. 이제는 생각한다. ‘혹시 그 사람도 나처럼 정보처리에 있어 어떤 감각의 편향이 있었던 건 아닐까?’ 내가 나의 감각구조를 알게 된 이후, 타인의 행동도 더는 ‘이상함’이 아니라 ‘다름’으로 보인다. 진단은 나만을 위한 것도, 나만 바꾸는 것도 아니었다. 세상을 바라보는 내 태도도 함께 바꿨다. 타인을 위한 포용력 0.1% 증가 6. 글을 정리하며 - 나는 나를 어떻게 대하게 되었는가? 💡 자책하며 살아오던 나의 진짜 사용 설명서 나는 항상 대화를 놓쳤고, 사람들은 내가 집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내 잘못이 아니었다. 내 뇌가 듣는 걸 잘 못하는 구조였다는 걸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걸 모른 채, 나는 정말 너무 오래 멀쩡한 척을 하며 살아왔다. 나는 게으르다고 생각했고, 의지가 약하다고 자책했고, 왜 자꾸 마무리를 못 하냐며 나를 고장난 물건처럼 여겼다. 그런데 아니었다. 나는 망가진 게 아니라, 설명서를 몰랐던 거다. 진단은 낙인이 아니라, 나에 대한 설명서다. 그걸 알게 된 순간, 나는 처음으로 나를 이해할 수 있었다. 설명서가 있다는 건, 이제 나를 고치려 애쓰는 대신, 나를 이해하고 다룰 수 있게 됐다는 뜻이다. 그건 꽤 괜찮은 일이다. 지금도 여전히 지각하고, 산만하고, 언젠간 이미 산 물건을 또 사는 날도 다시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제는 “왜?”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다. 그 답은, 나를 다정하게 대하는 첫걸음이 되었다. 예전에는 실수할 때마다 나를 다그쳤지만, 지금은 포용할 수 있다. 그 작은 인정 하나가 일상을 다르게 만든다. 나는 나를 탓하는 대신, 관리할 수 있는 나로 이해하게 되었다. 이건 ‘실패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게 아니라, ‘실수해도 괜찮은 나’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그리고 그건, 설명서를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태도다. 나는 짐승 합격 🍀 럭키비키~! 💬 그리고, 자책하고 있는 또 다른 당신에게 혹시 당신도 자꾸 산만하다는 말을 듣고, 이미 한 말을 또 묻는다고 핀잔을 듣고, 머릿속이 너무 산란해서 메모를 놓치고, 할 일이 떠오르지 않아 조급해지고 있다면. 그게 꼭 당신의 잘못은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연 나이 서른 살이 되어서야 내 삶의 사용설명서를 받았다. 검사를 받는다고 갑자기 지각을 안 하게된다거나 안 하던 청소를 하는 등 인생이 뒤집히는 건 아니지만, 설명이 생긴다는 건 생각보다 큰 변화였다. 그 설명은 나를 바꿨고, 나의 관계를 바꿨고,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도 바꿨다. 나는 진단 이후 처음으로 나를 이해했고, 덕분에 타인을 덜 원망하게 되었다. 나도 몰랐던 나의 결핍을 알게 되자, 타인의 이상한 행동들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혹시 당신도 ‘나는 왜 이럴까’라는 생각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이래서 나는 안 돼’라는 말로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다면, 오래된 자책 속에 살아가고 있다면, 한 번쯤 사용설명서를 받아보길 바란다. 그건 나를 부정하는 일이 아니라, 나를 이해하는 일이다. 그리고 당신도 나처럼, 스스로를 조금 더 다정하게 대하게 되길 바란다. 나 또한 지금이라도 받아들였기에, 이제 나는 그 설명서대로 살아보려 한다. 그거 아세요 여러분? ADHD는 사실 All Day Happy Day 증후군임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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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맨 만큼 나의 땅이 되기를
개발자 2024년 회고
2025-01-24 14:05
2024년, 나의 (만)28살은 꽤 변화무쌍한 한해였다. 철인 3종 대회를 출전하는 버킷리스트를 이루지만, 오랫동안 통증이 심하던 무릎이 결국 수명을 다 해서 연골 절제 수술을 받게 되었다. 10년 차 개발자가 되고 엔씨에서 3년간 개발한 프로젝트도 성공적으로 잘 런칭했으나, 정리해고 칼바람과 함께 희망퇴직을 하게 되었다. 야구장에서 시구도 하고, 다이빙 자격증도 취득하고, 베이스기타도 치며 많은 취미를 즐기면서도 어느 순간부터 SNS는 멀리하게 되었다. 이 글은 그러한 나의 2024년이 담긴 연말 회고다. 무릎 수술과 대회 포기 🩼 나는 선천적으로 무릎에 희귀 질환이 있는 가족력이 있다. 스무 살이 되던 해 엄마가 ‘너 외가 쪽 이모들 다 무릎 안 좋은 거 눈치챘어?’라는 질문을 받으며 처음으로 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나에겐 그 희귀질환이 발병된 것으로 보이진 않았으나 남보다 무릎 연골이 많이 약하긴 했다. 굳이 과한 운동을 하지 않아도 일상생활만으로 통증을 느끼기 시작한 지도 10년이 다 되어가니까. 그러다 9월, 익산 철인 2종과 시화 철인 3종 대회를 앞두고부터는 더 심상치 않아져서 MRI를 촬영하게 되었고, MRI 사진으로 확인한 내 연골판은 이미 다 갈려서 조각조각된 채로 뼈끝을 간질이고 있었다. 의사 선생님도 조금은 당황해하며 ‘아니 아직 너무 어리신데…‘라는 말만 계속 반복하시다가 수술이 필요하다는 소견을 내리셨다. 처음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서 ‘수술하면 괜찮아지는거죠?’같은 드라마 대사 같은 질문을 해댔다. 연골 절제술에 대한 설명과 함께 앞으로 운동 계속하시기는 힘들 것 같다는 말을 하셨는데 자세히는 잘 기억 안 나고, 막상 진료실 밖을 나오고 나니 눈물이 계속 나서 병원 로비에 앉아 주룩주룩 울어대기만 했다. 그 일로 많은 것이 바뀌었다. 다이빙, 운동, 수영 같은 것으로 가득 차 있던 내 피드의 알고리즘이 수술, 재활, 장애 같은 것들로 바뀌어 있었다. 그때부터는 하루에 열 개씩 올려대던 인스타 스토리같은 것도 안 올리게 되었다. 왜냐하면 사소한 일상들이 더 이상 재밌지 않아졌거든. 철인 대회 접수 취소를 하면서도 접수비 환불이 안 된다는 안내 같은 것 조차에도 쉽게 우울해했다. 물론 다른 걸 돌려받을 수 있다면 접수비쯤은 돌려받지 않아도 울지 않았겠지. 수술 직전 기록용 셀카 무릎 수술 직후 감각이 없던 다리 휠체어의 눈높이에서 올려다보는 세상 🦽 수술을 위해 병원에 입원했다. 이직하는 과정에서도 하루의 공백조차 내본 적 없었는데, 처음으로 회사에 휴직계를 제출했다. 막상 입원하고 나니 500만원의 수술비와 척추에 꽂는다는 큰 마취 주사 등등이 무서워서 더 이상 눈물이 안 났다. 수술이 끝난 뒤 한동안은 휠체어를 타고 다니며 병원을 누볐는데, 병원 안을 쏘다닐 때는 휠체어만 타면 어디든 갈 수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더 이상 우울해하지도 않고 심지어 자신감도 생겼다. 그러나 퇴원하고 막상 병원 건물을 나서보니, 아. 병원 밖엔 휠체어로는 갈 수 있는 곳이 아무 곳도 없다. 인도의 모든 보도블록은 좁고 울퉁불퉁하다. 그마저도 자꾸 오토바이나 트럭, 공유 킥보드가 주차되어 있고, 가로수 때문에 휠체어 하나가 제대로 지나갈 수 없어 차도로라도 나가려고 하면 단차 때문에 내려갈 수 없었다. 정상적으로 보행할 때의 나는 거의 모든 식당 입구에 단차가 있다는 사실을 왜 몰랐을까? 심지어는 지나가다 휠체어를 판매하는 가게에도 단차가 있는 것을 보고 조금 웃었다. 대부분의 시내버스가 저상버스로 운행되는 것은 알지만, 유튜브로 몇몇 후기를 찾아보다 바로 포기했다. 일반 택시는 딱 한 번 타봤는데, 트렁크에 휠체어가 들어가지 않아 뒷좌석에 넣고 나니 기사님께 너무 실례되는 것 같아 그 뒤로는 택시도 안 탔다. 벤티는 예약해야하는 시스템이라서 필요할 때 바로 이용할 수도 없었다. 어느 날은 오피스 건물 7층에서 1층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타야 할 일이 있었다. 퇴근 시간이라 그랬는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았고, 도착한 엘리베이터에도 사람이 많아서 휠체어가 탈 자리는 없어 보였다. 나와 같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쉽게 엘리베이터에 탑승했고, 그러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지만 말없이 ‘닫기’ 버튼을 누르셨다. 그 뒤로도 몇개의 엘리베이터에 탑승하지 못한 채 한참을 내려보내다가, 어느 순간 나타난 누군가의 양보로 겨우 탑승했다. ‘닫기’ 버튼을 누르던 사람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차피 그 뒤로 백화점에서도, 어떤 상가 건물에서도, 코스트코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겪었으니까. 뚜렷하게 공포로 남아있는 경험은 있다. 가게에서 친구가 계산하는 걸 옆에서 기다리며 둘러보던 중에 갑자기 어떤 남자가 ‘제가 밀어드리겠다’라며 휠체어를 타고 있던 날 밀었다. 당황해서 ‘네? 누구세요? 뭐 하는 거예요?’ 하니 그제야 갑자기 날 이상한데 세우고 말도 없이 가버렸다. 아직도 무엇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친구들과 미니언즈 분장하고 민속촌 나들이 갔던 할로윈데이 🎃 마지막 마라톤과 철인 3종 👟 수술 전인 상반기, 무릎 상태가 많이 안 좋은 걸 몰랐던 덕분에 마라톤과 철인 3종에 출전할 수 있었다. 올해는 부산에서 주최된 기브앤레이스 마라톤과 수원에서 주최된 경기 마라톤, 그리고 서울에서 주최된 한강 철인 3종에 출전했다. JTBC 마라톤과 익산 철인 2종, 시화 철인 3종 대회도 신청하긴 했었으나 무릎 수술 때문에 출전하지 못했다. 특히 올해는 기록이 정말 아쉬운 해였는데, 올 초 F45를 하다가 비복근이 파열되어서 발목과 종아리 회복이 덜 된 채로 마라톤에 출전했다. (무릎이 안 좋기 때문에 발목과 종아리 부상이 잦다.) 철인 3종에서는 핀(오리발)을 실수로 집에 두고 가서 맨발로 수영했고, 자전거도 워낙 비싼 자전거다 보니 분실이 걱정돼 따릉이(ㅋㅋ)로 자전거를 탔다. 그래도 2개의 마라톤과 1개의 철인 대회를 성공적으로 완주했고, 이로써 내 버킷리스트를 채웠기 때문에 나도 더 이상 욕심내지 않는다. 가장 건강했던 시기에 가장 행복한 방법으로 최선을 다해 청춘을 빛냈다고 생각한다. 한강 철인 3종 완주한 날 ✨ 어쩌면 인생의 마지막 달리가 될 기록 NC DINOS 시구 ⚾️ 작년인 2023년에 ‘야구 최다 관람자’로 선정되어 시구 기회가 주어졌고, 올해 5월에 시구를 하게 되었다. 마침, NC가 성적이 좋아서 시구 날이 무려 1위 결정전이 되었고, 게다가 그날 상대 팀 에이스 선수가 장염에 걸려서 출전하지 못했다. 내가 시구만 잘하면 왠지 이 기운을 담아 NC가 1등으로 치고 올라갈 것 같은 그런 날이었다. 한숨인지 기합인지 모를 숨을 내뱉고, 포크볼 그립을 잡고, 어설픈 와인드업 자세를 취하고, 1분 같은 1초 뒤, 공이 날았다. 그런데 진짜 거짓말 안 하고, 정말 진심으로, 내 생각보다 내가 공을 진~짜 잘 던졌다. 나름의 자부심을 가지기도 했던 게, 일반인 여자 시구는 마운드보다 한참 앞에서 던진다고 했는데 시구 연습을 도와주신 NC 포수 코치님이 마운드에서 던지셔도 될 것 같다는 말도 하셨으니까. 연습 때보다도 더 잘 날아간 공이 정확히 포수 글러브에 들어가고, 그 긴장한 와중에도 관객들이 ‘오~’하는 소리와 박수 소리도 들렸다. 퇴장하는데 신민혁 투수가 하이파이브도 해줬다. 그런데 하필 내가 시구를 할 때 중계사에서 상대 팀 에이스 선수의 장염에 관해 이야기하며 자료화면으로 넘어갔다. 내 시구는 그렇게 전설로만 남았다. 진짜다. 아, 그리고 NC는 그날 졌다. 전설의 시구 ✨ 풀스택 개발자로의 NC SOFT 정복기 ⛳️ NC SOFT에 입사한 지 만 3년을 두 달 앞둔 8월 초, 풀스택 포지션으로 개발에 참여한 통합 협업 플랫폼 ‘ON AIR’가 런칭되었다. 풀스택 개발자로 전직한 뒤 처음 참여한 프로젝트이기도 하고, 이제까지 경험했던 프로젝트 중 가장 호흡이 길기도 해서 런칭 경험이 특히 새로웠다. 프로젝트 과정 중에서 Spring과 Quarkus를 처음 사용해 보고, 한 번쯤 꼭 해보고 싶던 A-Z 개발도 해봤다. 기획서를 받고 직접 구성을 설계해서 DB 테이블도 만들고, API도 설계하고, 연동도 하고, 화면까지 그려서 디자인 요구사항까지 적용하는 일. 리포트나 대시보드 같은 기능은 Backend가 힘들었고, 인터랙션이 많은 칸반뷰는 Front가 더 힘들었다. 그런데 모든 게 힘들었던 만큼 정말 매 순간이 즐겁게 느껴졌다. 특히 리포트의 통계 API를 만들 때 요구사항이 너무 까다로워서 많이 괴로워했는데, 오히려 그 과정에서 개발이 천직임을 다시금 느끼기도 했다. 퇴근하는 것보다 야근하는 것이 더 즐겁게 느껴지는 경험도 정말 오랜만이었으니까. 런칭하면서 다양한 동료 기획자와 개발자, 디자이너와 함께했고, 기억에 남은 동료들도 특히 많다. 우선 10년 경력 중 가장 멋진 기획자이자 PM이자 PO를 만났다. 협업 플랫폼을 기획하는 기획자인 만큼 프로젝트를 매니징하는 실력 또한 정말 나이스했다. 덕분에 페르소나를 정의하고 요구사항을 수집하는 과정부터 개발 이후 FGT진행까지 함께 참여하고, 실리콘밸리에 온 것처럼 여러 가지 개발 방법론도 사용해 보고 적용해 봤다. 그리고 동료 개발자분들에게도 본받을 점을 많이 느꼈다. 업무가 기능 단위로 분리되어 있다 보니 개발자끼리는 협업할 포인트가 많이 없었는데도, 늘 먼저 신경 써주고 도와주려고 하는 동료들이 있었다. ‘함께 일하고 싶은 동료’란 ‘일 잘하는 동료’ 정도로만 생각했었는데, NC에서 만난 개발자 아저씨들(?) 덕분에 조금은 다른 시각을 갖게 되었다. 난 정말 3년 내내 받기만 했는데도 떠날 때 미안해하시더라. 이토록 좋은 동료들을 만났음에 참 감사했다. 함께 일했던 동료들 희망퇴직과 권고사직 그 사이 ☔️ 프로젝트 런칭 후 무릎 수술로 인한 휴직이 끝나고 10월에 복직하고 나니 복직 이틀 차에 갑자기 온갖 기사와 함께 전사 공지가 떴다. “희망퇴직 프로그램 진행”. 갑자기 수 많은 부서가 없어지고, 파편화되고, 분사되고, 합병되었다. 여기서 포인트는 내가 무릎 수술 전, 부서를 이동해놓고 휴직했다는 것이다. 복직하고 나니 3년간 몸담았던 조직은 희망퇴직 프로그램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내가 새로 이동한 조직은 희망퇴직 대상팀이 아니었다. 위로금과 잔류를 고민하는 전 팀원들과 대화하면서도, 서로가 서로에게 섣불리 위로나 부러움을 건네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분사 이슈가 겹치며 살얼음판을 걷는 회사 분위기 속에서 그나마 위로금을 받고 퇴직하는 사람이 승자인 것처럼 기조가 흘러가기 시작했는데, 그러다 모든 조직에 희망퇴직과 동일한 위로금 조건으로 권고사직 할당량이 추가로 떨어졌다. 사실 난 작년 평가 등급이 매우 좋은 편이어서 기대를 안 하고 있었으나, 감사하게도 직속 실장님은 휴직자와 업무 미 배치자를 대상으로 우선 면담을 시행하며 나도 대상자가 되었다. 선착순처럼 사직서가 수리되며 블라인드에는 ‘실장이 친한 사람들에게만 권고사직 기회를 줬다’는 모순되고도 웃긴 썰이 돌기도 했는데, 심지어 나 또한 팀장님에게 비슷한 질문을 받았었다. 런칭>팀 이동>휴직>위로금>퇴직이 미리 계획한 것처럼 순서대로 잘 이루어져서, 나로서는 런칭과 동시에 무릎 수술까지 끝낸 뒤 큰 위로금을 받고 NC SOFT를 떠나게 되는 최고의 기회였다. 아, 덤으로 실업급여도 받았다. NC에서의 마지막 날 청소년 코딩 교육 재능 기부 📚 회사를 그만둔 덕에 매년 연말에 하던 재능 기부에 올해는 더 많은 시간을 쓸 수 있게 되었다. 12월,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내가 직접 워크샵을 기획할 기회가 주어졌는데, 막상 직접 기획하려 보니 어려움이 많았다. 기획 단계에서 의도한 가장 큰 포인트는 ‘창의성’이었다. 코딩을 떠나 ‘직접 만드는 경험’의 즐거움을 느꼈으면 싶었고, 그 과정에서 창의적인 결과물이 나오길 원했다. PPT를 따라 코딩하며 모두가 똑같은 결과물을 만드는 ‘수업’을 진행하고 싶지 않았을뿐더러 그 과정이 재밌기 어렵다는 것도 잘 안다. 그리고 ‘실패’하는 경험이 없었으면 했다. 가장 어려운 건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2시간 동안 진행해야 하다 보니, 흥미를 이끌만한 주제여야 하면서도 집중을 유지할 수 있도록 워크샵을 구성해야 했다. 그리고 어떤 학생들은 아직 저학년이거나 코딩에 대한 지식이 적었으나, 어떤 학생들은 이미 게임까지 개발했다는 학생들도 있었기 때문에 코딩을 처음 해보는 학생도, 많이 해본 학생도 즐겁게 참여할 수 있는 워크샵이어야 했다. 이 모든 학생을 대상으로 분반 없이 워크샵을 진행해야하는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점점 더 욕심이 생겼다. 이 공들인 기획을 학생들이 알아주었을지 모르겠으나, 자정 정각에 시작된 참가 신청 접수가 1분 만에 마감되었다는 담당자분의 연락을 받고는 참 기뻤다. 내가 기획하고 진행한 워크샵의 이름은 ‘코딩으로 나만의 패턴 만들기’. 스크래치를 활용해서 반복문과 좌표 개념을 익히고 본인이 직접 그린 패턴으로 또 다른 패턴을 만드는 과정이었다. 다행히 워크샵은 성공적으로 잘 끝났고, 걱정했던 게 무색하게 학생들의 집중도도 매우 좋았다. 기획이란 게 참으로 어렵기도 했으나, 흔히 접할 수 있는 통일화된 코딩 교육이 아닌 신선하고 양질의 컨텐츠를 제공하고 싶은 염원대로 학생들이 잘 즐겨준 것 같아서 기쁘고 보람차고 행복한 과정이었다. 내가 진행했던 워크샵 포스터 Advanced Open Water Diver, 스쿠버 다이빙 🤿 퇴사 후 더 즐길 수 있게 된 것 중 하나는 스쿠버다이빙이다. 취미로 프리다이빙을 즐기며 해외 포인트를 나갈 때 아쉬워서라도 꼭 스쿠버다이빙을 한 번씩 하는데, 자격증이 없다 보니 현지 마스터 손에 들려 다니는 게 아쉬웠다. 그래서 올해 8월 보홀 여행 직전, 한국에서 스쿠버다이빙 OW(Open Water) 자격증을 취득했다. 보홀에서 고래상어와 같이 헤엄도 치고, 국내 바다도 다니며 고성과 울릉도의 조류를 온몸으로 느끼고 왔다. 그리고 OW를 취득한 지 3개월 만인 11월, 더 상위 레벨인 AOW(Advanced Open Water)까지 취득하게 됐다. OW는 수심 18M까지만 잠수할 수 있는데, AOW가 있으면 더 깊은 포인트나 난파선, 동굴 같은 지형 다이빙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취득 과정에서 SMB 사용하는 법도 배우고, 난파선 다이빙, 야간 다이빙, 나침반, 완벽 부력, 딥 다이빙 스페셜티까지 수료했다. 로그북도 열심히 쓰다 보니 벌써 25 로그가 되었다. 바다에 25번 입수했다는 뜻이다. 60 로그를 채우고 나면, 다이빙 마스터 과정에 도전하고 싶은 욕심이 있다. 프리 다이빙으로만 가보던 세부 바다를 처음으로 스쿠버 다이빙으로 갔다. 내가 즐긴 모든 것들: F45, 스노우보드, 프리다이빙, 야구, 뮤지컬, 전시회, 베이킹, 춤, 베이스, 그리고 해리포터 ⚡️ 작년에 이어 올해도 열심히 한 것들은 F45와 스노우보드, 프리다이빙, 그리고 야구 관람. 올해는 어쩐지 기회가 좋아서 스카이박스석도 3번이나 다녀왔다. 그리고 올해 더 열심히 한 것들은 ‘혼자서 하기’. 혼자서 뮤지컬도, 전시회도 참 많이 보러 다녔다. 주변에는 이런 취미를 같이 즐길 사람이 없어서 늘 구인하고 다녔는데, 이젠 혼자서도 씩씩하게 잘 놀러 다니는 업그레이드 E가 되었다. 새롭게 배우기 시작한 것들도 있는데, 베이킹이랑 춤을 잠시 찍먹했다. 베이킹은 집에 장비를 들여놓을 용기까진 안 나서 동호회를 통해 요리학원을 갔고, 소금빵이나 휘낭시에, 스콘, 다쿠아즈 같은 것들을 만들었다. 춤은 어느 순간 갑자기 꽂혀서 댄스 학원에 갔는데, 르세라핌 안무를 배우다가 지쳐서 바로 포기했다. 나름 열심히 운동 한다 생각했는데 안 쓰는 근육을 쓰다 보니 단순히 몸 푸는 걸로도 근육통이 왔다. 😂 그리고 베이스 기타도 배웠다. ‘내일은 탑 밴드’라는 초보 밴드에서 나름 합주도 여러번 했다. 밴드에 관심을 가지다보니 페스티벌도 다녔다. DMZ 피스트레인도 가고, 인천 펜타포트도 갔다. 아쉬운 게 있다면 올해는 책을 몇 권 못 읽었는데, 그래도 목표했던 해리포터 시리즈 전권 완독은 이뤄냈다. 어릴 땐 책을 읽고 영화를 보는 것이 관례였는데, 하필 한창 읽던 때가 마지막 편인 ‘죽음의 성물’이 출간되기 전이었다. 그때 시기를 놓친 바람에 책도 못 읽고 영화도 안 본 채로 10년을 혼자 해리포터의 결말을 모른 채로 지냈는데, 올해에서야 드디어 책도, 영화도 다 읽었다. '내일은 탑 밴드' 합주하던 날 보홀에서 만난 거북이 개발자 10년, 그리고 쿠팡으로 이직 🚀 올해는 내가 개발자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한 지 10년째 되는 해였다. 만 10주년 셀프 선물을 뭐로 할면 좋을지 고민이 많았는데, 희망퇴직 덕분에 스스로에게 여유를 준 것 같아서 나쁘지 않은 선물이었다. 시간과 금전적인 여유 덕분에 쉬면서 유럽 여행도 다녀왔다. 환승 이직만 해본 데다가 불경기라 재 취업 걱정도 많았지만, 어쩌다 보니 쿠팡 리쿠르터에게 연락이 와서 면접을 보게 되고 핏도 잘 맞아서 희망퇴직 접수 일주일 만에 다음 회사 결정이 완료됐다. 연봉도 많이 올리고, 처음으로 회사 주식도 받아봤다. (신기해!) 나중에 시간이 되면 10년에 걸친 개발자 회고록도 적어보고 싶다. 아, 그걸 내 2025년 목표로 세워야겠다. 쉬는동안 다녀온 이탈리아 여행 나의 네번째 회사, 쿠팡 마치며 내 인생은 내가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서른이 다 되어도 매년 새로운 이벤트가 생기는 걸 보면 실은 아직도 내 인생을 잘 모르나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계속 삶을 영위하는 것 자체에 순간적인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가 겪는 모든 시행착오와 어려움이 결국은 소중한 경험과 성장의 기반이 되기를. ‘헤맨 만큼 나의 땅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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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건 레벨업이 아니라 스펙트럼을 넓히는 것이다.
개발자 2023년 회고
2024-01-04 01:43
매년 으레 하듯이 새해 계획을 세우다 보면 ‘내가 되어야 할 것’의 그림을 그려놓고 계획을 세우곤 했다. 그러고 나면 연말마다 못 이뤄낸 목표를 두고 내가 왜 그것을 못 해냈는지에 대한 회고를 하곤 했었는데, 그 반성 타임이 싫어서 올해는 ‘잘 지키기 위한 노력‘보다 ‘잘 지키기 위한 수단’ 같은 필승법을 가져가야겠다는 전략을 짰다. 내가 하고 싶은 거 하기. 그게 내 2023년 필승법이었고 덕분에 올해 회고는 예년보다 소박하고 사사로움에 예년보다 편안하다. 👟 달리기 시작 천식+평발+무릎 연골 손상 등의 이유로 달리기가 적합한 몸은 아니긴 하지만 지구력, 정신력을 늘리기 위해 달리기를 시작했다. 달리기를 시작하며 인터벌 훈련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RunDay’ 앱의 도움을 많이 받았었는데, 처음 1~2주 차 때 1~2분 달리기만 시키더니 어느 순간 6주 차가 되니 갑자기 7분씩 달리라고 하더라. 그때에는 그 7분이 너무 힘들어서 달리다가도 스스로 ‘컨디션이 안 좋다’ 등의 핑계를 대며 달리기를 멈추곤 했었다. 그렇게 한창 진도를 못 나가던 중 어느 날은 포기하기 싫어졌다. 사실 그때에는 잘하려고 했다기보단 나 자신과의 은밀한 타협 같은 거였다. ‘속도를 낮추고 뛰자.’ 그렇게 8.5k/h로 뛰던 것을 7.5k/h로 속도를 낮추고 뛰었더니, 저속도의 7분 달리기는 생각보다 너무 가뿐하고 쉬웠다. 오래 달리기 위해서 천천히 달리는 것. 너무 간단한 진리인데 나는 스스로 깨닫기 전까지 몰랐다. 3달 동안 거의 매일 쉬지 않고 달리며 '런태기'를 극복해 나갔다. 결과는 완주! 🏊♀️ 수영, 아니 유영 수영에서도 달리기와 마찬가지였다. 영법 교정만 해왔던 기존과 달리 올해는 1시간에 2km를 쉬지 않고 수영하기 위한 목표를 잡고 노력했는데, 처음엔 왕복 5번만 해도 숨이 차고 힘들어서 이걸 어떻게 해내지 싶었다. 그러다 어느 날 같은 레인에서 내겐 할머니쯤 되어 보이는 연세의 여성분이 쉬지 않고 1시간 내내 느릿느릿하게 수영하시는 모습을 보게 되었고, 그분의 뒤를 따라 천천히 수영을 해봤다. 그러다 보니 조금 더 속도를 내어도 완주할 수 있겠다 싶은 나의 페이스를 찾게 되었다. 아래는 그 과정에 있던 그날의 일기다. 내 모든 힘을 써가며 수영할 때는 34분 동안 525m 를 갔다. 6'03"/100m 페이스다. 힘을 풀고 저강도로 천천히 돌면 더 많이 유영할 수 있음을 깨달은 오늘은 43분 동안 1,125m를 갔다. 3'52"/100m 페이스다. 그리고 오늘은 처음으로 1km가 넘는 거리를 자유형으로 왕복하게 된 날이기도 하다. 조급해하지말고 나에게 맞는 속도로 가야 오히려 더 빨리, 더 오래 지속할 수 있음을 깨달은 날. 그리고 1년이 지난 나는 이제 1'57" 페이스로 39분 만에 2km를 쉬지 않고 수영할 수 있다. 🏃♀️ 생애 첫 마라톤 출전 그렇게 수영도 달리기도 꾸준히 하다 보니, 지구력과 폐활량이 많이 늘었다. 어느새 한 시간 동안 쉬지 않고 뛸 수 있게 되면서 묘한 자신감이 붙어 10K, 11K 마라톤을 신청하게 되었다. 그런데 마라톤 출전을 한 달 앞두고 무릎이 엄청 안 좋아지면서 가장 열심히 연습해야 할 때 오히려 연습을 못 했다. 일상생활 중에도 무릎이 많이 아파서 출전하지 말까 하는 고민도 종종 했었고, 어느 날은 날씨가, 어느 날은 계단이, 어느 날은 유전자가 원망스러운 날들을 보냈다. 여기서 소신 발언을 하자면 난 딱히 운동을 좋아하지 않는다. 운동이란 나에게 있어, 그냥 ‘추구미’ 같은 거다. 그런데 이제 컨셉에 사로잡혀서 지독한 컨셉충이 되어 버린.. 사실 마라톤도 그래서 나갔다. ‘달리는 걸 너무 좋아한 나머지 아픈 무릎도 잊고…’ 이런 시나리오가 아니라, 그냥 ‘마라톤에 나가는 내 모습’에 취해서 나간 거다. 😅 꽤 민망하고 웃기지만 여튼 그렇게 아픈 무릎을 이끌고 두 번의 마라톤을 완주했다. 뉴발 10KM 마라톤, 그리고 서울달리기 11KM 마라톤 🚵♀️ 철인 3종 동호회 가입 당연히 철인 3종 동호회에 가입하려고 가입한 것은 아니다….. 어느 날 사내 게시판에 프리다이빙 동호회 홍보 글이 왔길래 반가운 마음에 가입 신청을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프리다이빙은 동호회 내 작은 소모임 같은 거였고, 사실 그 동호회는 수영+런닝+달리기를 하는.. 이른바 ‘철인 3종’ 동호회였다. 제가 갑자기 철인 3종 동호회를 가입했다고요..? 😳 그러다 동호회 게시판에서 ‘한강 수영 크로스 챌린지’ 참가자를 모집한다는 글을 보게 되었다. 관심이 생겨서 문의했는데, 오픈워터 수영을 처음 해본다고 하니 수영 반장님(?)이 거의 혼내듯이 잔소리하면서 헤드업 영법을 배워야하니 당장 이번 주말에 수영 정모를 나오라고 했다. 솔직히 동호회 활동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데 반장님이 무서워서… 나갔다. 정모에 나가보니 내가 엄청나게 어렸다. 그냥 어린 게 아니라.. 진짜 어렸다. 정신 차려보니 내가 모르는 아저씨들이랑 수영을 하고 있었다. (ㅠㅠㅠ) 그리고 나만 여자였다. 그래서 진짜 도망가고 싶었다. 수영 정모 끝날 때마다 브런치도 먹고 헤어진다고 해서 난 그때까지도 국밥 같은 거 드시러 가시는 줄 알았다. 그런데 따라가 보니 진짜 리얼 ‘브런치’를 사주셨다. 다들 정말 친절했고 텍스트로는 너무 무서웠던 수영 반장님도 한 시간 내내 헤드업 영법을 봐주시면서 많은 도움을 주셨다. 때마침 그날 뵀던 동호회원 한 분이 본인이 다니는 소규모 레슨 센터를 소개해 주셔서 그 뒤로는 그분과 함께 수영도 다니게 되었다. 그러다 어느날은 자전거를 못 탄다는 내 말에 가르쳐주시겠다고 하시며 어디선가 자전거를 빌려오셨다. 알고 보니 수영을 같이 다니던 이분이 자전거 반장님이셨다. 반장님의 초등학생 딸이 쓰던 헬멧을 쓰고 점심시간마다 자전거 앉는 법부터 변속, 공기 주입 방법까지 배웠다. 처음 라이딩을 나가는 날엔 영상도 찍어서 만들어주셨는데 그 영상은 지금 봐도 웃기다. 여튼 그렇게 수영도, 자전거도 타다가 여차저차 마라톤도 나가게 되면서 런닝 반장님도 뵙게 되고… 이제와보니 어느덧 어엿한 철인 3종 동호회의 일원이 되었다. 수영 정모 첫날 얻어먹었던 '진짜' 브런치 🏅 첫 오픈워터, 그것도 한강 횡단 한강 횡단을 준비하는 동안, 출퇴근 시간에는 자유 수영을 가고 점심시간에는 런닝을 하며, 틈틈이 수영 레슨을 받느라 남들 주 3~4회 운동할 때 나는 일 3~4회 운동했다. (푸하하) 매일 다섯 번씩 머리를 감으며 ‘이게 맞나?’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쨌든 그렇게 한강 횡단을 준비했다. 어쩌겠어, 이것이 내 ‘추구미’니까…^^ 한강 횡단의 진짜 큰 산은 대회 당일에 있었다. 횡단 장소는 잠실대교였는데, 잠실대교 밑에는 수중보가 있어서 물살이 꽤 거세다. 나는 그곳을 횡단해야 하는 것이다. 달리는 지하철 창 너머로 보는 한강은 분명 반짝이는 하늘빛이었는데 내가 뛰어들어야 하는 한강은 묘하게 청록색과 회색이 섞인 갈색이었다. 수많은 인파가 한 번에 입수해야 하기 때문에 안전 요원들이 참가자들의 부이를 마구 당기고 밀며 입수시킨다. 처음 맡아보는 강 비린내와 거센 물살 속에서 그렇게 초반 300M를 패닉 수영했다. 물살이 너무 세서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면 내가 왼쪽으로 떠밀려가고 있었다. 분명 헤드업 한 채로 수영하는데 자꾸만 자꾸만 계속 몸이 밀린다. 아니 헤드업을 하긴 하는데 자꾸 내 이마가 다 잠기도록 파도가 친다. 물속은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자꾸 누군가의 오리발이 나를 치고, 한강은 생각보다 차갑고 깊었다. 물살에 떠밀리지 않도록 대각선으로 스트로크하면서 내가 한 생각은 딱 하나였다. ‘아, 이거 내년엔 절대 하지 말아야지…’ ‘나 이거 낙오되지 않고 완주할 수 있나?’ 의심이 들던 찰나에 어느 순간 종점이 보였다. 그제서야 몸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완주하고 나니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들어서, 물 밖으로 나오고도 내가 나온 물속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리고 기록은 놀랍게도 실내 연습 때보다 훨씬 잘 해낸 1’27”. 내가 23분 만에 한강을 횡단했다. 금메달, 그리고 함께 완주한 동호회 사람들 🤿 프리다이빙 자격증 취득 프리다이빙도 드디어 다시 시작했다. 3년 전쯤 처음 프리다이빙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자마자 COVID19가 몰아치면서 당시에 선입금한 3n만원 강습료가 공중분해 되었던 아픈 기억이 다시 떠올랐지만 어쨌든 새 강사님을 구했다. 유산소 운동들 덕분에 폐활량이 늘어서 그랬는지 스태틱(숨 참기)도 첫 측정에 바로 2분 45초가 나오고, 다이나믹(잠영)도 바로 성공하긴 했는데, 역시나 3년 전처럼 이퀄라이징이 잘 안됐다. 가끔 극소수의 확률로 처음부터 이퀄이 잘 된다는 사람들이 있다고는 하던데 아쉽게도 그게 내 얘기는 아니었다. 강사님이 하라는 대로 운전 중에도, 업무 중에도 쉬지 않고 성문을 열고 닫으며 프렌젤 이퀄 연습을 하는데 귀가 안 뚫려서 속상해하던 중에 강사님이 물 밖에 나와서 목 움직임을 한번 보자고 했다. “물 밖에선 잘 되는 거 같은데? 이번엔 물 속에서 하던 대로 코를 잡고 다시 해보세요.” 이러시길래 그제서야 알았다. “아.. 물속에서 이퀄할때 코 잡아야 해요?” 황당해하는 강사님을 뒤로한 채 코를 잡으면서 이퀄을 하니 말도 안 되게 너무 잘 된다. 슉슉 내려가지는 줄도 모르고 신나게 핀질하다가 처음으로 16M까지 내려가면서 딥스테이션 바닥에 머리도 찧었다. 그렇게 드디어 AIDA level 2 자격증을 취득했다. 이제 아파트 7~8층 정도의 깊이만큼 하강+잠수할 수 있다는 뜻이다. 숨 참기 + 잠영 + 구조 + 하강 + 이론 시험을 모두 통과했다. 여름휴가로 다녀온 보홀 바다. 물속에는 또 다른 세상이 있다. 🏋️ F45 100회 달성 6월 말 쯤 회사 정기 주차에 낙첨하게 되면서 수영을 지속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러다가 팀원이 F45 일주일 체험을 함께해보자고 꼬셔서 네명이서 함께 일주일 체험을 등록했는데 하루 만에 모두 떨어져나가고 나 혼자 남았다. 나는 일주일 체험비로 결제한 3만원이 아까워서 계속 나갔다. 매일 점심마다 영혼 탈곡된 채로 복귀해서 힘없는 손으로 점심 먹고 그랬는데, 막상 일주일 다 하고 나니 첫날만큼 그렇게 힘들진 않았다. 그리고 회원 등록하면 일주일 체험 비용 3만원도 환급해 준다고 했다. 그래서 F45를 다니게 됐고, 하반기 동안 열심히 한 덕분에 100회 출석을 달성했다. 🎉 매 운동이 끝나면 다 같이 기념사진을 찍는다. (자세히 보면 2024를 표현한 것입니다.) 열심히 출석한 흔적들과 나의 마일스톤 그리고 🚴 로드바이크 🏌️ 골프 🏂 스노우보드 🏃 트래킹 아래는 수영이나 런닝만큼의 시간을 쏟진 않았지만 나름 즐겁게했던 운동들이다. 일부러 계절을 나눠서 했던 건 아닌데 봄에는 골프, 여름에는 로드바이크, 가을에는 트래킹, 겨울에는 스노우보드를 탔었다. 그 외에도 소소하게 가끔 서핑, 크로스핏 등등을 했다. 사실 각 챕터별로 쓰자면 더 쓸 수 있는데 이러다간 연말 회고가 아니라 운동 기록이 될 것 같아서 이쯤에서 자제하고 사진으로 대체한다. 💻 SQLD 자격증 취득 회고의 반 이상이 운동이다 보니 내가 운동만 하는 사람 같겠지만 어쨌든 난 개발자다(…). 7년 반 정도 앱 개발을 하다가 현 회사로 이직하면서 웹 풀스택 개발로 직무를 변경했으니, 풀스택이 된 지 이제 2년반 정도 된 셈이다. 그런데 이게 참 그렇다. 막상 웹 개발을 주니어부터 다시 시작하려니 실무 능력이 떨어지는 내 모습이 참 답답하다. 전생 기억 그대로 환생 시켜준대서 개이득 외치며 콜 했는데 알고 보니 아프리카 대륙에서 환생시켜 준 그런 느낌이다. 여튼 백엔드도 프론트엔드도 아직 공부할 것이 너무 많고 갈 길이 멀었다는 뜻이다. 개발 연차가 있으니까 금방 해낼 줄 알았는데 팀 시니어들에 비하면 턱도 없는 것 같다. 그래서라고 하긴 뭐하지만, 뭐라도 해보자 싶어서 SQLD 자격증을 공부했다. 게다가 우리 프로젝트에서는 JPQL을 쓰고 있고 그마저도 QueryDSL을 작성할 일이 거의 없어 가장 기본적이여야할 쿼리 능력이 부족한 것 같은 느낌이 컸다. 그런데 문제는 이 SQLD 자격증이 대학생도 취득하는 거라는데 난 너무 어려웠다. 쿼리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실무에서 쓰지도 않는 함수를 외워야 했고 계층형 쿼리는 아직도 반 이상은 제대로 이해 못 한 것 같다. 시험장에서도 전부 나가는데 나 혼자 시간 끝까지 다 쓰며 앉아있었다. 공부 더 열심히 할 걸 후회하며 헷갈리는 문제를 몇 번이고 다시 풀어가면서 마킹하다가, 시험 종료 종이 울려서 울며 겨자 먹기로 제출하고 왔는데… 대체 어떻게 붙은걸까? 여튼 붙었다. 심지어 헷갈리는 문제 제외하고도 합격점이었다. 헤헤 ⚾️ KBO 전 구장 출석 회사 행사로 NC다이노스 야구를 보러 갔다가 야구에 빠져서 2년째 계속 야구에 미쳐있는 중이다. 작년에는 수도권+홈구장 위주로만 다녔는데, 올해는 전 구장을 다 가보고 싶어서 ‘KBO 전 구장 원정 응원가기’를 목표로 잡았다. 그런데 이게 생각보다 어려운 도전이었다. 지방까지 내려가서 경기를 보는 만큼 한번 갈 때마다 2연전, 3연전 시리즈를 다 보고 오려 노력했는데, 전국 구장이 10개다보니 그 짓을 최소 10번 이상 해야 했다. 한 번씩만 다녀온다고 쳐도 대략 30일 정도니, 일 년 12개월 중 최소 꼬박 1개월 이상을 야구 보는 데에 시간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야구라는 게 그렇게 순탄하지가 않다. 이미 난 숙소도 다 예약하고 연차도 내고 운전까지 해서 땅끝까지 내려왔는데 우천 취소 폭탄 맞고 갈 곳을 잃어버리는 가슴 찢어지는 경험을 해야 한다. 게다가 3연전 다 져서 스윕당하는 경기 보고 올라갈 때는 진심으로 웃음이 안 나온다. 몸도 힘들고, 마음도 힘든 그런 도전이었다. 물론 NC가 야구를 잘했으면 마음은 안 힘들었겠지? 😊 그래도 포스트시즌 진출해 줘서 기뻤던 올해 🏆 23시즌 최다 관람자 선정 (+내년 홈 경기 시구 위촉) 여튼 그렇게 직관하러 다니다 보니 잠실, 고척, 수원, 인천, 대전, 대구, 광주, 창원, 부산까지 구장별로 대략 최소 5번 정도는 원정 응원을 다녀왔다. (전국을 신출귀몰하는 덕분에 어떤 지인들은 가끔 내가 직장 생활을 청산한 줄 오해하지만 실제론 이만큼 개인 시간을 내기 위해 일도 엄청 많이 했다.) 여튼 올해 시즌 144일 중 50일은 넘게 매일 야구장에 있는데, 그러다보니 내가 모기업에서 집계한 최다 관람자로 선정되었다. 😳 게다가 덕분에 내년 시즌 NC다이노스 홈 경기에 시구자로 선정되는 영광도 같이 얻었다. 처음에 연락받고는 부담이 엄청나게 컸는데, 부모님께 말씀드리니 의외로 너무 기특해하셔서(?) 올해 처음으로 효도한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내년 회고엔 야구 시구 후기와 함께 찾아올 수 있을 것 같다. 최다 관람자로 선정된 후 선수들이랑 함께 사진도 찍었다. 무려 아시안게임 주역들과... 🙏 1년 이상 안 만났던 친구들 만나기 올해 또 다른 목표는 ‘사람들 만나기’였다. 그것도 1년 이상 안 만났던 친구들 10명 만나기. 너무 오랫동안 안 본 친구한테 만나자고 하면 다단계 가입이나 결혼 초대 등을 의심할 것 같아서 1년 정도의 구간을 목표로 잡았는데, 막상 만나다 보니 1년을 훌쩍 넘어 10년 동안 못 만났던 친구들도 참 많이 만났다. 고등학교 올라가면서 연락이 끊긴 중학교 친구들, 고등학생 때 같은 기숙사 방을 썼던 룸메이트들, 점점 연락을 못 하게 되었던 이전 직장 동료들, 그리고 그때엔 분명 친했는데 환경이 멀어져서 서서히 못 만나게 된 친구들까지. 목표로 잡았던 10명보다 훨씬 많이 만났다. 만나다 보니 서로의 기억 속 친구들 이름이 나오고, 그러다 다음 모임에는 또다시 인원이 늘어서 만나고… N년만에 연락하면 다들 부담스러워할 줄 알았는데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 정말 서로가 서로를 너무 반가워했었다. 어쩌면 내가 올해 한 일 중 가장 잘한 일이 아닐까 싶다. 내가 직접 연락하는 경우 말고도 ‘언제 한번 밥 한번 먹자’는 평범한 안부들을, 올해는 그냥 넘기지 않고 약속을 잡아댔다. 덕분에 한 해가 너무 바쁘고 정신없었지만, 나에게는 정말 행복하고 소중하고 감사한 시간이었다. 사람들을 만날 때 가장 행복한 나 💌 동료들에게 편지 쓰기 올해가 되면서 또 한 게 있다면 함께 일하는 동료들에게 편지를 쓴 일이다. 특별히 고마웠던 분들이 많아서 조그맣게 편지를 쓰다 보니 어느 순간 내가 실원들 모두에게 편지를 쓰고 있었다. 한두 시간이면 끝날 줄 알았던 편지쓰기는 꼬박 3일을 주구장창 써도 끝나질 않았고, 동료들에게 편지를 주고 나니 묘한 해방감과 함께 꽤 뿌듯해져서 딱 그 보람만큼의 가치 있던 일 정도로 마무리될 줄 알았다. 그런데 어떤 분은 내가 쓴 것보다 훨씬 길게 답장을 주셨다. 그 답장을 몇 번이고 한참 읽고 나서야 동료들이 왜 내 편지에 이렇게 고마워하는지, 왜 미안해하는지, 그리고 왜 감동하는지 조금 알 것도 같았다. 각 편지봉투의 그림은 친한 디자이너분이 그려주셨다. 💇♀️ 3년간 기른 머리 기부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단발로 살다가, 모발을 기부하면 소아암 환자에게 가발을 만들어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머리를 기른지 3년 쯤 되었다. 기부하기 위해선 파마와 염색을 하지 않은 건강한 자연 모의 상태로 25cm 이상을 길러야 하는데, 기르다 보니 위에 서술한 대로 운동 스케줄 상 하루에 다섯 번씩 머리를 감게 되면서 ‘긴 머리’가 굉장히 지치고 거추장스러워졌다. 그때부터는 한 달에 열 번씩도 더 머리를 잘라버리고 싶은 충동이 있었지만 최대한 긴 기장의 머리를 기부하고 싶어서 겨울까지 꾹 참았다. 막상 머리를 자르는 당일은 묘하게 조금 아쉽기도 했지만, 미용사 선생님께 자르고 난 모발을 넘겨받으니 숱도 많고 기장도 길어서 가발이 참 예쁘게 잘 나오겠다 싶어 뿌듯했다. 그렇게 전달 된 내 모발은 소아암 환자들을 위한 가발이 되었다. 허리까지 오던 긴 머리를 잘랐다. 🧑🏫 코딩 교육 봉사활동 매년 꾸준히 청소년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려고 노력한다. 재능 기부를 통한 직무 멘토링 같은 것들도 자주 했고, 작년과 올해는 성남시 초등학생들에게 코딩 교육을 할 수 있는 봉사활동에 참여했다. 이번 봉사활동은 아두이노와 라즈베리파이를 연결하고 파이썬 코딩을 해서 노래도 나오고 빛도 내는 전자 오르골을 만드는 클래스였다. 1:1로 짝을 지어서 함께 페어 코딩을 하는 프로그램인데, 매칭된 짝꿍과 아이스브레이킹 차원에서 대회를 해보니 둘 다 도구리 캐릭터를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검증(?) 질문들에 제대로 대답을 못 해서 인정받지 못했다. 나 진짜로 도구리 좋아하는데ㅠㅠ) 다행히 나한테 도구리 스티커가 정말 많아서 스티커를 왕창 가져오니 짝꿍 친구가 신나서 열심히 오르골을 꾸며줬다. 원래 그러면 안 되는데 몰래 내 도구리 인형도 줬다. 심지어 저녁 먹을 때 몰래 빠져서 불닭볶음면도 같이 끓여 먹었다. 정말 밝고 긍정적인 친구여서 회고를 쓰는 지금도 꽤 인상 깊게 회상이 된다. 기회가 되면 또 볼 수 있을까? 짝꿍 친구가 열심히 꾸며준 우리 팀 오르골 📚 올해 읽은 책은 11.5권 독서를 편식하는 습관을 고쳐보고자 장르별로 골고루 읽어보려 노력했지만 결국 내가 완독할 수 있는 책은 정해져 있었다. 그 와중에 ‘총균쇠’는 반 정도까지 읽다가 결국 다 못 읽고 포기했다. 그래서 올해 읽은 책은 12권이 아닌 11.5권이다. 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간다 (유성호), 말의 품격 (이기주), 우리는 왜 잠을 자야할까 (매슈 워커), 숨 (테드 창), 총균쇠 (재러드 다이아몬드), 뇌의 기막힌 발견 (스티븐 후안), 살고싶다는 농담 (허지웅), 자기 결정 (페터 비에리), 인생을 숙제처럼 살지 않기로 했다 (웃따), 언어의 우주에서 유쾌하게 항해하는 법 (신견식), 도덕적 인간은 왜 나쁜 사회를 만드는가 (로랑 베그),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유시민). 내가 올해 읽은 책.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은 허지웅의 '살고 싶다는 농담'이다. 🐲 용인으로 이사 사실 올해의 가장 큰 변화는 8년간의 서울 자취 생활을 끝마치고 용인으로 이사를 하게 된 것이다. 판교로 출퇴근하게 되면서 서울살이 난이도가 급격하게 올라가게 되어 회사 인근으로 이사 갈 필요가 생겼고, 또 운전을 시작하며 주차장이 협소한 서울 오피스텔에서 살기가 너무 힘들었다. 그렇게 8월 말 용인으로 이사를 했고, 무려 거실이 있는 투룸을 갖게 되었다. 집이 커진 덕분에 요리도 하고, 피아노나 컴퓨터도 둘 수 있고, 늘어나는 짐에 마음 쓸 필요가 없어서 삶의 질이 올라갔다. 오피스텔에서 아파트로 이사를 오다 보니 가전/가구를 모두 새로 사야 해서 셀프 혼수하는 느낌이라 지출이 많긴 했지만, 오로지 나만을 반기는 나의 새로운 집이 너무 좋다. 친구들이 놀러 올때마다 에어비앤비 온 것 같다고 하는 우리 집 💤 마치며 결론적으로 하고 싶은 걸 하자는 필승법은 꽤 성공적이었던 것 같다. 예년보다 공부도 덜 하고 특별한 노력도 덜 했지만, 오히려 훨씬 많은 수확을 얻을 수 있던 한 해였다. 🏃 마라톤도 나가고 🏊 한강 수영 횡단도 하고 🤿 프리다이빙 자격증과 💻 SQLD 자격증도 취득하고 💇♀️ 모발도 기부하고 ⚾️ 시구도 하게 되고 🫶 오래된 친구들도 만나고 💌 동료들에게 편지도 쓰고 🧑🏫 봉사활동도 하고 📚 책도 읽고 🏡 이사도 하고. 제목에도 적은 대로 내 올 한해는 딱 그런 한 해였다. 스펙트럼을 넓힌 해. 사는 건 레벨업이 아니라 스펙트럼을 넓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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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자의 3, 5, 7년 슬럼프 이야기
2021-12-30 20:12
난 요즘 연차를 일부러 깎아 말하는 경향이 있지만, 굳이 따지면 8년차다. 최근에 번아웃과 8개월 정도를 씨름하다 이제 다시 자리를 잡아가는 중인데, 회고 겸 흑역사 셀프생성 겸 나의 번아웃 전투기를 작성하기로 했다. 올 초 정도인 7년차 쯤 찾아온 번아웃(혹은 슬럼프)의 이야기다. 난 ㄱㅏ끔... 슬럼프가 찾아온다... 주니어때는 직장인의 3.5.7 슬럼프를 우스워했다. 직장인 3/5/7년차마다 슬럼프에 빠진다는 말이 굉장히 우습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개발이 항상 내 천직이라고 생각했고 (직업만족도 150%) 어떤 때에는 일찍 퇴근하는 것보다 야근하는 게 더 즐거웠던 적이 많았으니, 언젠간 성장 상승곡선이 완만해질 때는 오더라도 하락할 때가 올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내가 가장 타격을 받지 않는 말이 (혹은 오히려 화나는 말이) ‘소연님 그렇게 한다고 알아주지 않아요’라며 농담반 진담반으로 퇴근을 보채던 동료들의 잔소리였는데, 난 이 모든 게 정말 좋아서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열두 시를 가리키는 시계 같은 것들은 방해요소라고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슬럼프를 이해하지 못했던 3년차 만 2년을 찍고 딱 3년차로 넘어가는 즈음부터 내가 굉장히 날아다녔는데, 일단 주어진 업무에서 어려운 것이 하나도 없었고 무조건 연차가 많다고 테크리딩을 하는게 아니라는 것도 깨달았다. 기회와 권한을 흔쾌히 양보해준 당시 동료들과 매니저 덕분에 무려 3년차가 테크리딩을 했었고, 그 뒤로도 연속으로 4개의 프로젝트를 리딩하며 매해 꾸준하게 높은 동료평가를 받았다. 그래서 그랬는지 슬럼프란 것은 나랑 거리가 먼 개념이라고 생각했다. 3년차 김소연의 모습 5년차에 찾아온 매너리즘은 이직으로 해결이 되었다. 그러다 갑자기 만 5년이 가까워지던 때에 매너리즘이 찾아왔었는데, 매너리즘을 겪던 당시의 가장 큰 고민은 크게 아래 2가지였다. 나와 주변 동료들 간의 온도 차가 다르다고 느껴진다. 생각해보니 난 업무를 잘하는 것이지, 개발을 잘 하는 건 아닌 것 같다. 프로젝트를 테크리딩했지만 어쨌든 동료들의 마인드케어를 하는 매니저는 아니었기 때문에, 나 혹은 동료들보다 프로젝트가 더 중요할 때가 많았다. 어쩔 땐 동료들을 극한으로 몰아가거나 상처를 주기도 했었고, 그런 온도 차를 해결(?)하는 데에 코딩보다 많은 시간을 쏟다 보니 내 모습이 개발자 같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안된다는 사람들을 보면 될 때까지 안 해서 그렇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내가 과연 개발자로서 좋은 평가를 받는 게 맞는가? 하는 생각도 자주 들기 시작했던 것 같다. 난 A를 위해서 B를 하는 건데 B를 더 인정받고 있는 기분이랄까. 그러나 그렇게 몇 달을 날 괴롭히던 매너리즘은 이직함으로써 의외로 쉽게 사라졌다. (그전에는 이직이란 선택지를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주어진 상황에서만 문제를 해결하려 했었다.) 환경이 변화 된 후 날 괴롭히던 많은 생각으로부터 편안해졌고, 새로 만난 동료들과 새로운 업무 속에서 긍정적인 동기부여를 받으며 매너리즘은 자연스레 사라지게 되었다. 그때 써놓았던 글을 읽으면 이제는 더 이상 와닿지 않지만, 짠하기도 하고 성숙함과 동시에 미숙했구나 싶다. 그 당시 작성한 글 7년차에 찾아온 번아웃은 이직으로도 해결되지 않는다. 그러다 7년차가 되는 즈음 다시 한번 슬럼프가 찾아왔다. 5년차에 찾아온 슬럼프가 매너리즘이었다면, 7년차에 찾아온 슬럼프는 번아웃이란 단어가 정말 잘 어울린다. 그러나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에야 번아웃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사실 처음엔 위의 2~3년전쯤 찾아온 매너리즘 수준 정도의 슬럼프라고 생각했었다. 2~3년전 찾아온 매너리즘은 이직으로 해결을 했으니, 이직이 도움이 될 거라는 착각도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바로 이직을 결심한 건 아니고 내 나름의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많은 것들을 하고 결정을 내렸다. 임원 알레르기가 있다는 시덥지 않은 농담이나 하던 내가 1차 리더, 2차 리더, 3차 리더, 심지어 (구)리더까지 찾아가며… 나의 슬럼프를 업무를 통해 극복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나 혹은 파트원들의 슬럼프가 생길 때마다 퇴사자를 만들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나와 파트원들의 근무환경을 개선하기 위해서, 회사의 방향에 우리가 공감하고 따라갈 수 있기 위해서, 우리가 정말 잘 할 수 있는 그런 일들을 하기 위해서. 대충 그런 노력과 싸움들을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내 롤이 꽤 이상해졌다. 내가 이런 것들을 생각보다 잘한다는(wellX not stressfullyO) 사실을 깨달았고, 개발 실력보다는 언변과 추진력이나 책임감 같은 것들로 업무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게임으로 치자면 스탯을 이상하게 찍었다. 스탯 잘못 찍은 개발자 (추진력 1650/1650, 개발 0/0) 그러던 중에 이직 오퍼를 받았고, 리더들과 길고 긴 상담 끝에 결국엔 새로운 회사로 이직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직을 하면 이 무기력한 매너리즘이 해결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더 심해졌다. 그제야 깨달았다. 아 이거 매너리즘 아니구나. 내 번아웃은 더 이상 나의 내일이 기대되지 않는 것이었다. MBTI나 애니어그램 같은 심리/성향 테스트를 하면 공통적으로 나오는 키워드가 ‘성과지향’이다. 난 굉장히 목표지향적이고 낙천적이며 과업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매너리즘은 성장이 잠시 정체되어있던 나에게 성취감을 안겨줌으로써 해결되었던 반면, 번아웃은 그런 과업조차 무게감으로 느껴졌다. 새로운 일이 시작되었는데 전혀 기대되지 않았고, 나를 자극시키는 태스크들이 이제는 내 몸을 눌렀다. 모든 것에 지쳐있었고 업무능률이 저하되고 있음을 느꼈다. ‘워크=라이프’였던 나에게 업무능률의 저하는 삶의 질까지 영향을 미쳤다. 더 이상 내일이 기대되지 않았고, 돌려 막기 하다시피 하루를 끝내면 이제 이 모든 것을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했다. 그냥 해이해진 것뿐인데, 왜 나는 예전처럼 다시 추스르고 돌아가지 못하고 있을까? 이제는 그럭저럭 먹고살 만한 건가? 내 꿈을 잊어버렸나? 생각해보니 그렇게 아등바등 살 필요도 없지 않나? 아니 잠깐, 내가 아등바등 살긴 했나? 이쯤 부터 일상 자체도 무기력해지기 시작했다. 그저 1차원적인 쾌락을 쫓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먹고 싶을 때 먹었고 자고 싶을 때 잤다. 스스로와 타협했고, 날이 갈 수록 책상이 점점 어질러졌다. 재미있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난 번아웃이 올 자격이 없다. 내가 번아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이유는 단순했다. 난 번아웃이 올 만큼 많은/강도높은/어려운 일을 하지 않았다. 빡세던 첫 회사를 5년을 다녀도 괜찮았는데, 이 정도에서 무슨 번아웃? 그것도 2년밖에 안 다녔는데? 사무실에 출근해서 동료들과 합을 맞출 때는 여전히 재밌다. 딱히 안 쉰 것도 아니다. 아니 오히려 연차 잘 썼다. 좋은 리더와 동료들 덕분에 리프레시 기회도 여러번 받았고 되려 내가 회사에 갚았으면 갚아야했지 못 받은건 없었다. 그런데 그럴때마다 무력함이 더 커져갔다. 전투형 인간인 내가 회피형 인간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집중도도 자꾸만 떨어지고, 1.5인분을 해도 모자른 마당에 1인분도 못 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심지어 PO를 제안 받을때 평소의 나라면 굉장히 신나고 두근거려야하는데 그때는 부담감으로만 다가왔었다. '번아웃은 핑계고 사실은 그냥 일을 하기 싫은건 아닐까?'하는 죄책감에 괴로워했었다. 진짜 이러다가는 남에게 피해를 끼치겠다 싶을때, 원인을 곰곰히 생각해보기로 했다. 사실 이 단계가 가장 어려웠다. 번아웃 그게 뭔데. 어떻게 하는건데. 관련된 책도 많이 읽어보고 혼자 여행이라도 떠나서 생각할 시간을 가졌더라면, 더 양질의 성찰이 가능했을 것 같다. 그러나 그럴 기력조차 없어서 그냥 가성비 성찰을 했다. 사무실에서 일하기 싫을 때마다 옥상에 올라가며, 출퇴근할때마다 창 밖을 바라보며, 잠 드는게 아쉬워서 눈을 감으며. 한번에 바로 떠올리지는 못했다. 그냥 추적을 하고 또 하다보니 도달한 원인들이다. 1.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업무의 연속 딥러닝 프로젝트를 잠시 할 때 딱 이런 박탈감을 느꼈었는데, 어떠한 데이터를 가지고 최적화된 모델링을 한다는 것이 나에게는 정량적이지도, 정성적이지도 않다고 느껴졌다. 하이퍼파라미터를 미세하게 조정하며 데이터에 맞는 모델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얻은 성과가 나의 능력 같지 않았다. 수상을 했지만 남의 잔치에 와 있는 기분이었다. 그 뒤를 이어서 맡게 된 그 당시의 업무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나에게 권한이 있긴 한데.. 뭔가 애매하게 있었다. 앱 개발을 하려면 API를 만들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백엔드 개발 조직에는 나의 권한이 없기 때문에 뭘 할 수가 없었다. 조직장들을 열심히 설득해서 인력을 충원하고 나면 그 인력들은 priority가 더 높은 다른 업무들에 배치되었다. 어느 순간엔 내가 개발자가 아니라 사업을 따러 다니는 사람 같았다. 푸하하.. 그런데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어서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글로 써놓으니 내가 쉽게 포기한 것 같지만 난 장장 2년을 그 환경을 만드는 데에 많은 시간과 마음을 썼다. 홍보하겠다고 기술 블로그도 만들고.. 서버 개발자 입사할 때마다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것처럼 엄청 잘해줌.. 여튼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다하는 것 같은데 상황이 나아지질 않는다는 생각에 박탈감을 많이 느꼈다. 앱이 왜 이렇게 느리냐는데, 가장 잘 해결할 수 있지만 절대 해결하지 못하는 나 2. 과도한 셀프 채찍질 올해 초부터 목표를 달성하는 방식을 바꿨었다. 작년까지는 task 단위였다면 올해는 time 단위로 측정하기 시작했는데, 30분 단위로 내가 무엇을 했는지 기록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원하던 하루의 목표를 이룰 때마다 기뻤다. 그러나 어느 날엔 유튜브를 보거나 친구를 만나면 그날 나의 목표를 이루지 못한 것이 되었다. ‘아 공부를 했어야 했는데..’, ‘책을 읽었어야 했는데..’ 이런 반성을 매일 해야만 했고, 7색 형광펜으로 시간마다 무엇을 했는지 색을 칠하다 보면 빨간색으로 색칠된 ‘유튜브’, ‘넷플릭스’ 칸들이 나에게 잘못된 하루를 보냈다고 혼을 내는 것 같았다. 이 주엔 유튜브도 보지 않았고 약속도 잡지 않았다. 3. 체력의 하락 갑분 체력? 할 수도 있지만 그만큼 번아웃의 원인을 깊게 추적했다. 일차적인 원인은 COVID19일 수도 있지만, 헬스장에 출입할 수 없게 되면서 꽤 오래 지속된 아침 운동 습관이 한 방에 무너졌다. (물론 홈트를 하면 되지만 하지 않음.) 내가 고강도 운동을 했던 건 아니지만, 그 1시간의 운동을 안 함으로써(혹은 그만큼 식사와 술로 스트레스를 풀면서..) 체력이 떨어지고 체중이 늘었다. 2~3개월 정도 쉬다가 다시 운동을 하게 되었는데, 살이 찐 것을 만회하고 싶어서 탄수화물을 잘 안 먹었다. 그랬더니 체력이 더 떨어졌다. 체력을 기르려고 운동을 하는 건데 체력이 없어서 운동이 안 됐다. 쉽게 피곤하고 쉽게 지치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체력을 되찾으려면 체력을 길러오세요. 채찍질의 대가였던 내가 이세계에선 번아웃의 원인? 이런 과정을 통해 내/외부적인 요인이 모두 작용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다만 외부적인 요인이 주원인이었다면 환경이 바뀜으로써(=이직) 해결이 되어야 했는데 그러고도 번아웃이 지속되는 걸 보니 내부 원인이 더 크다고 생각했다. 난 열심히 살아보려 했던 건데 나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꼴이라니. 스스로 불러온 번아웃에 짓눌려 그러다 멈춰보니, 번아웃의 원인을 찾으려 고민하는 과정이 의외로 이 번아웃을 이겨내는 데에 도움이 되고 있었다는 생각을 문득 하게 되었다. 높은 자존감에 감춰져 있던 내가 아닌 지쳐서 보잘것없는 인간 김소연을 돌아보며 지속적인 회고를 했었고, 번아웃 기간 이전의 나를 회고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내가 지향하는 것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approach 하는 과정이 꽤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돌이켜보니 어느 순간부터 나는 ‘성장하는 나’보다 ‘완벽한 나’만을 사랑하고 있었다. 이걸 깨닫는 데에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성장이라 함은 매 순간 더 나아져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가끔은 절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나는 이제 받아들이고 극복해야 한다. 글을 시작할 때 ‘이제 다시 자리를 잡아가는 중’ 이라고 했는데, 나는 아직 이 시행착오의 비용을 받아들이는 과정(아직 싸우는 중)에 있다. 과거의 난 무의식중에 긍정적인 결과만 취급했었고, 긍정적이지 않은 것들은 과정을 잘 포장해서 결과로 만들기도 했었다. 완전한 결과 중심적인 나에게, 불명예스러운 나의 모습을 인정하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번아웃은 결과 중심의 사고를 하던 내가, 지나온 과정을 깊게 성찰할 수 있던 부정적이고도 특별한 기회다. 그러니 나는 이 번아웃을 끌어안기로 했다. 과정도 나고 결과도 나다. 1. 직무를 변경했다. 번아웃을 해결하려고 이직한 게 아니라 번아웃 중에 이직을 한 것이지만, 어쨌든 이직하면서 직무를 변경했었다. 6년 동안 앱 개발을 하다 보니 업무에 있어서 더는 어려운 게 없었고, 할만한 수준을 넘어 재미없는 수준까지 왔었던 것 같다. 어차피 은퇴할 때까지 앱 개발만 하다가 늙을 것은 아니니 다른 것을 해보자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이직 후 현재는 풀스택 웹 개발자로 일하고 있다. 이 자체가 번아웃 해결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진 않았지만, 적어도 새로 이직한 상황에서 민폐를 끼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번아웃을 극복하려고 마음먹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또다시 새로운 동기부여를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일상에는 변화가 찾아왔으므로 꽤 시기적절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2. 주 단위의 주기적인 회고를 시작했다. 원인을 숙청하는 걸 넘어서, 이제까지 서툴렀던 Self-care를 앞으로는 좀 더 잘 해내고 싶었다. 나를 되돌아볼 시간이 주기적으로 필요하다고 느끼면서, 단기적인 check point들이 있어야 하고 마인드케어에도 시간을 들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번아웃의 원인을 또다시 나에게서 찾아내는 수치를 다시 겪고 싶지 않다는 반성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 다만 앞으로는 이번에 겪었던 과정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며 내 자신에게 시행착오의 비용을 적립해주기로 했다. 결과가 안 좋았어도 과정이 좋았거나, 과정이 아쉬웠어도 결과가 좋다면 긍정적인 것으로 인정하기로 했다. 배운 게 있다면 실패가 아니고 시행착오인 것으로 인정할 것이다. 스스로 꾸준한 실패를 주입하고 적립해서, 번아웃 바이러스를 대비하는 백신을 맞기로 했다. 3. 아침 수영을 다시 등록했다. COVID19가 물론 무섭긴 했지만, 무기력한 내 모습이 더 싫었던 것 같다. 체력을 다시 기르는 게 다른 것보다 중요할 것 같았다. 등록한 뒤로도 여전히 무기력함과 싸우는 중이라 안 나갈 때도 있었지만, 큰맘 먹고 수영을 다녀오고 나면 세상 누구보다 잘살고 있는 것 같아서 “원데이 자존감 pass”가 생긴다. 그리고 적어도 수영 중에는 아무 상념 없이 수영만 하게 되니까 힘든 것도 모르고 즐겁고 재밌기만 하다. 나에게는 또 다른 도피처이자 순기능이다. 혹시라도 번아웃/슬럼프 키워드를 통해 이 글을 보게 되신 분들께 이 짤을 헌정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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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올 해 이룬 것들, 2020년 연말정산
개발자 2020년 회고
2020-12-29 20:47
🐭 쥐띠해였던 올 2020년이 시작될 때, 올 한해는 나의 해라며 멋진 한 해를 만들어보자고 다짐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전례없이 막강한 코로나 바이러스가.. 2020년을 덮쳐버렸고.. 목표했던 많은 것들이 틀어지고 무산되며 하루 빨리 코로나 바이러스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다 결국 이렇게 2020년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유난히 어렵고 아쉬움이 많이 남은 해였지만, 그래도 밝은 마음으로 나의 2020년을 회고해보려고 한다. 📚 읽은 책 올 해는 총 10권의 책을 읽었다. 여름에 아이패드를 잃어버린 뒤로는 반년 가까이를 책 한 권 안 읽고 보내다 10월에 이북리더기를 구매한 이후에서야 다시금 책을 읽기 시작했다.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 해리포터를 정주행하고 싶어져서 시리즈 1권부터 읽기를 시작했다가, 잠시 접어두고 다른 책을 먼저 읽어야지! 했던게 어쩌다보니 1권만 읽고 끝나버린 정주행이 되었다. 검사내전: 초반에는 사례집을 읽는 것 같은 가벼움에, 후반에는 김웅검사의 가치관과 신념을 읽을 수 있는 무게감에 재미를 느끼며 읽었다. 일 중독 검사의 모습을 통해 여러모로 직업정신에 대한 동기부여가 되었다. 아주 작은 습관의 힘: 목표를 습관으로 수립하고, 그 습관을 점수화하여 매일 1%의 성장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덕분에 습관화를 목표로 데일리 점수체크 루틴을 계획할 수 있었다. 팩트풀니스: 언론에 선동당하지 않는 법과, 전 세계 국가들의 발전단계 별 도달한 수준을 자세하게 설명한다. 동물농장: 소련 공산주의의 시작과 번영 그리고 몰락을 이해하며, 웃기게도 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음을 감사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국가의 발전보다 나의 발전이 우선적일 때, 결국 나의 발전은 국가의 발전이다. 데미안: 읽으면서 내내 데미안을 향한 싱클레어의 감정은 사랑이었다고 생각했다. 다만 ‘알고보니 그 사랑은 데미안의 에바 부인이었다!’ 이런 전개가 좀 아리송하긴했는데.. 책 내용대로 무언가의 이끌림이 작용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동급생: 반전이 있는걸 알고 읽어서 생각한 만큼의 큰 반전은 아니었지만, 너무 절묘하고 생생해서 실화 기반 소설이 아닐까하는 착각마저 든다. 우정을 묘사하는 방식이 데미안과 비슷해서 일부분이 약간 겹쳐보였다. 1984: 디스토피아 문학을 읽고싶어서 읽게 된 책이다. 오만과 편견: 해리포터를 읽을 때는 영화속의 이미지가 소설을 잡아먹곤했는데, 이 책은 새로운 이야기를 읽는 것 마냥 영화와는 또 다른 이미지들을 그리면서 읽었다. 번역이 엉망이여서 힘들게 읽었다. 멋진 신세계: 내용과 결말 자체는 굉장히 가볍고 어렵지 않으나 읽고 난 뒤의 생각만큼은 무겁게하게 되는 책이었다. 나의 디스토피아는 무엇일지 고민하게 되는 책이다. ⛰ 등반한 산 올 해는 8개의 산을 등반했고, 그 중 7개의 정상석을 올랐다. 한라산: 일출을 보기 위해 잠을 자지 않고 바로 밤 새 산을 타느라 춥고 졸려서 힘들었는데, 그 만큼 역대급 일출을 보아서 행복했다. 수락산: 하산 길에 발을 헛디뎌서 난간에 빠지는 사고가 있었지만 그것 빼고는 참 쉬운 산이었다. 생각보다 암벽의 난이도가 높지 않아서 아쉬워했다. 북한산: 아이젠을 안 챙겨가는 멍청한 짓을 해서 깔딱고개까지 갔다가 하산했다. 그래도 하산 길에 자리잡아서 아침과 함께 일출은 봤다. 금오산: 한 여름에 오른 거라 중간 길은 케이블카를 이용했는데도 정말.. 힘들고.. 더웠다.. 나중에 봄이나 가을 쯤 동굴이 있는 코스로 다시 한번 오르고 싶다. 지리산: 일출산행이었지만 기상악화로 인해 해가 구름과 눈보라에 가려서 일출을 보지 못하고 내려왔다. 덕분에 지리산 일출산행을 다시 도전할 명분이 생겼다. 팔공산: 지리산 일출산행을 실패하고 바로 다음날 오기에 팔공산으로 일출산행을 도전했다. 다행히 일출이 꽤 예쁘게 떴으나, 철조망 때문에 일출을 제대로 관찰하기가 어려웠음에 아쉬움이 남는다. 덕항산: 태백산 일출산행 전 몸풀기 겸 올랐는데, 풍경이 없고 나무숲 뿐이여서 아쉬웠다. 그래도 올라갔다 내려오며 수다떨고 커피마시기에 좋은 산이었다. 태백산: 올해 마지막 산이자 일출이 가장 예뻤던 산이다. 천제단 너머로 떠오르는 해가 참 예뻐서 아직도 그 광경이 생생히 떠오르는데, 나중에 봄이 오고 풀이 예쁘게 피면 다시 한번 일출을 보러 가고싶다. 💻 진행한 프로젝트 회사 업무로 총 4개의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딥러닝 프로젝트부터 ReactNative, 하이브리드 프로젝트까지 진행했으니 나름 폭 넓게 진행한 셈이다. 그리고 틈틈이 사내블로그를 만들었다. 딥러닝 수요예측 시스템: 행사상품의 월별 판매량을 예측해서 재고를 절감하는데 기여했다. 딥러닝에 대해 지식이 전무한터라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꽤나 고생을 많이했다. 출퇴근길에 꾸준히 인강도 듣고 매일 늦게까지 남아서 하이퍼파라미터나 인풋값들을 변경해서 조금이라도 더 나은 결과를 얻으려고 신체적으로나 심적으로 많은 무리를 했었다. 덕분에 SCM 산업대상도 수상하는 등 대내외적인 성과가 있어서 그래도 나에게 유종의 미를 거두게 해준 프로젝트이다. 인마이백: 본격적으로 ReactNative를 해보게 된 프로젝트이다. 과거에 잠시 다른 프로젝트를하며 ReactNative를 훑어본적은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기회를 통해 본격적으로 한 뒤에야 이제 제대로 ReactNative를 경험해봤다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이 된 것 같다. 다만 ReactNative를 경험해본 팀원이 없어 삽질을 많이 한 덕분에 우리가 옳은 방향으로 잘 나아가고있는지를 잡아줄 수 있는 사람이 없던 것이 아쉬웠다. 올영EZ, 올리브라운지: 영업본부 구성원들을 위한 사내 한정 앱이다. 하나는 매장 카운셀링을 위한 태블릿 앱이고, 다른 하나는 소통/학습을 위한 모바일 앱이다. 두 앱 모두 하이브리드 앱이라 앱에서 할 일은 크게 없었지만, 올리브라운지를 진행하면서 처음으로 iOS 프로젝트를 다루게 되었고, FCM 푸시나 생체인식 등 간단한 기능들을 붙여가며 iOS를 손에 익힐 수 있었다. 사내 블로그: 올리브영 기술 블로그를 만들었다. 내 블로그와 마찬가지로 Github Pages와 Jekyll을 써서 구현했다. 업무도 업무 나름대로 바빠서 거의 해커톤하듯이 만들었다. ✏️ 공부 ADsP: 딥러닝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업무 지식도 익힐겸해서 매일 아침 1시간씩 일찍 출근해서 ADsP 공부를 했었다. 다만 시험 직전 봄 쯔음부터 코로나 바이러스가 확산되며 시험이 연달아 취소됐고, 아직까지도 시험에 응시하지 못한 상태다. 내년에 다시 시도할지 말지 고민이 된다. TOEIC, Opic, 전화영어: 승진조건이긴 했지만, 공인 영어 성적도 만들 겸해서 겸사겸사 영어공부를 했다. 학원을 다니면 좋았겠지만 돈도 없고 시간도 없는 직장인이라 아침마다 전화영어를하며 영어공부를 했다. 토익은 4번이나 접수했지만 코로나 때문에 취소되며 응시하지 못했고, 오픽만 응시해서 목표했던 성적은 획득했다. 내년부터는 분기별로 오픽을 응시해서 등급을 올릴 예정이다. Swift + iOS: 서적과 구글링으로 공부를 하며 프로젝트를 진행하다가, 연말되어서는 패스트캠퍼스 강의를 끊어서 iOS 강의를 수강했다. 구글링으로도 어찌어찌 프로젝트를 잘 수행한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좋은 강의를 듣는게 최고인 것 같다. 아직은 간단한 토이프로젝트를 만들 수 있는 수준밖에 안 되지만 내년에는 개인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본격적으로 이력화해볼 예정이다. 알고리즘: 대학생 친구들과 함께 매주 1회 알고리즘 스터디를 진행했다. 회사 팀에서도 신규 인력을 채용할 때 코딩테스트 문제를 선정하게 되는데, 정작 나도 못 푸는 문제들이 있어서 경각심을 갖고 스터디를 시작하게 되었다. 매 주차별로 분류 하나씩을 과제로 풀며 공부하고, 돌발 문제를 풀어보는 식으로 진행하고 있는데 시작 전에 비해 실력이 많이 향상된 것을 느낀다. 아직도 잘 푸는 문제는 잘 풀고 못 푸는 문제는 못 풀곤 하지만 꾸준히 반복학습을 진행하니 웬만한 분류들은 풀 수 있게 되었다. 운전면허: 작년에 차를 사려고 기능까지 따놨다가 마음이 식어서 그대로 기능만 합격한채로 방치해뒀었는데, 기간 만료 안내를 받고 허겁지겁 다시 도로연수를 받아서 바로 취득했다. 따고 나니 그때는 왜 그렇게 검정을 어려워했나하는 생각은 들지만, 역시 어렵긴 어렵다. 주행 자체보다 길을 외워야한다는 부담감이 더 컸던 것 같다. 그래도 이제 운전면허를 획득하게 되어서 해피! (면허는 바로 장농으로 들어갔다.) 💪 운동 수영: 코로나가 확산되기 이전과, 잠잠해졌던 중간중간엔 매일 아침 수영을 했다. 올해는 접영을 마스터하려고했으나, 강습 기간이 간헐적이여서 지속적으로 배우지 못했다. 웨이트: 수영을 못하게 되면서 헬스에 재미를 붙이고 싶어 PT를 등록했다. 주 2-3회 정도 웨이트를 진행하며 두달만에 근육량이 +2kg 가까이 늘었다. 런데이: 주 3회 유산소 달리기를 하며 30분동안 쉬지 않고 달릴 수 있는 체력을 만드는데 집중했다. 😷 새로운 일상 재택근무: 코로나가 본격화된 3월부터 재택근무를 시행했고, 재택근무를 통해 내가 생각보다 의지가 약한 사람이라는걸 알게되었다. 요즘은 자발적으로 꾸준히 사무실로 출근하고있다. 입원: 7월 경 1주 넘게 지속되는 복통을 참다가 어느 순간 맹장염이 의심될 정도로 아파져서 병원에 갔는데 대장에 문제가 있음을 알게되고 급작스럽게 입원을 하게 되었다. (사실 이렇게 해프닝으로 마무리 되어야 하는 이야기였는데, 6개월 뒤인 지금 나는 또 다시 같은 증상으로 입원을 해서 블로그 글을 쓰고있다.) 코로나 검사: 총 3번의 코로나 검사를 진행했다. 아파서 한번, 회사에 확진자가 나와서 한번, 그리고 입원을 위해 한번. 원래 아파도 병원에 잘 가지 않는 편인데, 올해는 주위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아플때마다 병원에 가려고 노력했다. 🏆 연말정산 사내 수상: 진행했던 프로젝트 2개가 회사 연말 시상식에서 각각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주식: 금액으로는 얼마 안 되지만 실현손익 +70.29%를 달성했다. 상반기에 인버스에 홀려서 -4% 정도의 출혈이 있었으나, 하반기에 중타를 잘 쳤다. 🎸 기타 버킷리스트 중 하나인 퀸 콘서트에 다녀왔다. 사실 13년도에 이미 이루긴했었지만, 올해는 락 페스티벌이 아닌 단독 콘서트였기 때문에 감회가 새로웠다. 회사 전사영상에 인터뷰 출연과 엔딩을 장식했다. 엔딩요정이라고 알아봐 주는 분들이 많았다. 마치며 코로나 때문에 반강제로 쉬어가는 한 해가 되었다. 사실 돌이켜보면 코로나 탓을 하기엔 내 의지가 부족했던 것도 크지만, 올해의 시행착오를 통해 내년 목표는 외부 요인으로 인해 무너지지 않도록 더 단단히 바로잡을 수 있는 큰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다. 연말 회고를 쓰는 것은 단순히 정리에 목적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쓰다보니 내 후년을 어떻게 보내야할지에 대한 각성에도 효과가 큰 것 같다. 내 후년 이맘때 쯤 2021년 회고록을 작성할 때에는 더 큰 유종의 미가 있었으면 좋겠다. 2020년을 수고하며 보낸 나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