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맨 만큼 나의 땅이 되기를
2024년 회고
2025-01-24 14:05
2024년, 나의 (만)28살은 꽤 변화무쌍한 한해였다. 철인 3종 대회를 출전하는 버킷리스트를 이루지만, 오랫동안 통증이 심하던 무릎이 결국 수명을 다 해서 연골 절제 수술을 받게 되었다. 10년 차 개발자가 되고 엔씨에서 3년간 개발한 프로젝트도 성공적으로 잘 런칭했으나, 정리해고 칼바람과 함께 희망퇴직을 하게 되었다. 야구장에서 시구도 하고, 다이빙 자격증도 취득하고, 베이스기타도 치며 많은 취미를 즐기면서도 어느 순간부터 SNS는 멀리하게 되었다. 이 글은 그러한 나의 2024년이 담긴 연말 회고다.
무릎 수술과 대회 포기 🩼
나는 선천적으로 무릎에 희귀 질환이 있는 가족력이 있다. 스무 살이 되던 해 엄마가 ‘너 외가 쪽 이모들 다 무릎 안 좋은 거 눈치챘어?’라는 질문을 받으며 처음으로 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나에겐 그 희귀질환이 발병된 것으로 보이진 않았으나 남보다 무릎 연골이 많이 약하긴 했다. 굳이 과한 운동을 하지 않아도 일상생활만으로 통증을 느끼기 시작한 지도 10년이 다 되어가니까.
그러다 9월, 익산 철인 2종과 시화 철인 3종 대회를 앞두고부터는 더 심상치 않아져서 MRI를 촬영하게 되었고, MRI 사진으로 확인한 내 연골판은 이미 다 갈려서 조각조각된 채로 뼈끝을 간질이고 있었다. 의사 선생님도 조금은 당황해하며 ‘아니 아직 너무 어리신데…‘라는 말만 계속 반복하시다가 수술이 필요하다는 소견을 내리셨다. 처음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서 ‘수술하면 괜찮아지는거죠?’같은 드라마 대사 같은 질문을 해댔다. 연골 절제술에 대한 설명과 함께 앞으로 운동 계속하시기는 힘들 것 같다는 말을 하셨는데 자세히는 잘 기억 안 나고, 막상 진료실 밖을 나오고 나니 눈물이 계속 나서 병원 로비에 앉아 주룩주룩 울어대기만 했다.
그 일로 많은 것이 바뀌었다. 다이빙, 운동, 수영 같은 것으로 가득 차 있던 내 피드의 알고리즘이 수술, 재활, 장애 같은 것들로 바뀌어 있었다. 그때부터는 하루에 열 개씩 올려대던 인스타 스토리같은 것도 안 올리게 되었다. 왜냐하면 사소한 일상들이 더 이상 재밌지 않아졌거든. 철인 대회 접수 취소를 하면서도 접수비 환불이 안 된다는 안내 같은 것 조차에도 쉽게 우울해했다. 물론 다른 걸 돌려받을 수 있다면 접수비쯤은 돌려받지 않아도 울지 않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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휠체어의 눈높이에서 올려다보는 세상 🦽
수술을 위해 병원에 입원했다. 이직하는 과정에서도 하루의 공백조차 내본 적 없었는데, 처음으로 회사에 휴직계를 제출했다. 막상 입원하고 나니 500만원의 수술비와 척추에 꽂는다는 큰 마취 주사 등등이 무서워서 더 이상 눈물이 안 났다. 수술이 끝난 뒤 한동안은 휠체어를 타고 다니며 병원을 누볐는데, 병원 안을 쏘다닐 때는 휠체어만 타면 어디든 갈 수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더 이상 우울해하지도 않고 심지어 자신감도 생겼다. 그러나 퇴원하고 막상 병원 건물을 나서보니, 아. 병원 밖엔 휠체어로는 갈 수 있는 곳이 아무 곳도 없다.
인도의 모든 보도블록은 좁고 울퉁불퉁하다. 그마저도 자꾸 오토바이나 트럭, 공유 킥보드가 주차되어 있고, 가로수 때문에 휠체어 하나가 제대로 지나갈 수 없어 차도로라도 나가려고 하면 단차 때문에 내려갈 수 없었다. 정상적으로 보행할 때의 나는 거의 모든 식당 입구에 단차가 있다는 사실을 왜 몰랐을까? 심지어는 지나가다 휠체어를 판매하는 가게에도 단차가 있는 것을 보고 조금 웃었다. 대부분의 시내버스가 저상버스로 운행되는 것은 알지만, 유튜브로 몇몇 후기를 찾아보다 바로 포기했다. 일반 택시는 딱 한 번 타봤는데, 트렁크에 휠체어가 들어가지 않아 뒷좌석에 넣고 나니 기사님께 너무 실례되는 것 같아 그 뒤로는 택시도 안 탔다. 벤티는 예약해야하는 시스템이라서 필요할 때 바로 이용할 수도 없었다.
어느 날은 오피스 건물 7층에서 1층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타야 할 일이 있었다. 퇴근 시간이라 그랬는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았고, 도착한 엘리베이터에도 사람이 많아서 휠체어가 탈 자리는 없어 보였다. 나와 같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쉽게 엘리베이터에 탑승했고, 그러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지만 말없이 ‘닫기’ 버튼을 누르셨다. 그 뒤로도 몇개의 엘리베이터에 탑승하지 못한 채 한참을 내려보내다가, 어느 순간 나타난 누군가의 양보로 겨우 탑승했다. ‘닫기’ 버튼을 누르던 사람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차피 그 뒤로 백화점에서도, 어떤 상가 건물에서도, 코스트코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겪었으니까.
뚜렷하게 공포로 남아있는 경험은 있다. 가게에서 친구가 계산하는 걸 옆에서 기다리며 둘러보던 중에 갑자기 어떤 남자가 ‘제가 밀어드리겠다’라며 휠체어를 타고 있던 날 밀었다. 당황해서 ‘네? 누구세요? 뭐 하는 거예요?’ 하니 그제야 갑자기 날 이상한데 세우고 말도 없이 가버렸다. 아직도 무엇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마지막 마라톤과 철인 3종 👟
수술 전인 상반기, 무릎 상태가 많이 안 좋은 걸 몰랐던 덕분에 마라톤과 철인 3종에 출전할 수 있었다. 올해는 부산에서 주최된 기브앤레이스 마라톤과 수원에서 주최된 경기 마라톤, 그리고 서울에서 주최된 한강 철인 3종에 출전했다. JTBC 마라톤과 익산 철인 2종, 시화 철인 3종 대회도 신청하긴 했었으나 무릎 수술 때문에 출전하지 못했다.
특히 올해는 기록이 정말 아쉬운 해였는데, 올 초 F45를 하다가 비복근이 파열되어서 발목과 종아리 회복이 덜 된 채로 마라톤에 출전했다. (무릎이 안 좋기 때문에 발목과 종아리 부상이 잦다.) 철인 3종에서는 핀(오리발)을 실수로 집에 두고 가서 맨발로 수영했고, 자전거도 워낙 비싼 자전거다 보니 분실이 걱정돼 따릉이(ㅋㅋ)로 자전거를 탔다.
그래도 2개의 마라톤과 1개의 철인 대회를 성공적으로 완주했고, 이로써 내 버킷리스트를 채웠기 때문에 나도 더 이상 욕심내지 않는다. 가장 건강했던 시기에 가장 행복한 방법으로 최선을 다해 청춘을 빛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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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C DINOS 시구 ⚾️
작년인 2023년에 ‘야구 최다 관람자’로 선정되어 시구 기회가 주어졌고, 올해 5월에 시구를 하게 되었다. 마침, NC가 성적이 좋아서 시구 날이 무려 1위 결정전이 되었고, 게다가 그날 상대 팀 에이스 선수가 장염에 걸려서 출전하지 못했다. 내가 시구만 잘하면 왠지 이 기운을 담아 NC가 1등으로 치고 올라갈 것 같은 그런 날이었다.
한숨인지 기합인지 모를 숨을 내뱉고, 포크볼 그립을 잡고, 어설픈 와인드업 자세를 취하고, 1분 같은 1초 뒤, 공이 날았다. 그런데 진짜 거짓말 안 하고, 정말 진심으로, 내 생각보다 내가 공을 진~짜 잘 던졌다. 나름의 자부심을 가지기도 했던 게, 일반인 여자 시구는 마운드보다 한참 앞에서 던진다고 했는데 시구 연습을 도와주신 NC 포수 코치님이 마운드에서 던지셔도 될 것 같다는 말도 하셨으니까. 연습 때보다도 더 잘 날아간 공이 정확히 포수 글러브에 들어가고, 그 긴장한 와중에도 관객들이 ‘오~’하는 소리와 박수 소리도 들렸다. 퇴장하는데 신민혁 투수가 하이파이브도 해줬다.
그런데 하필 내가 시구를 할 때 중계사에서 상대 팀 에이스 선수의 장염에 관해 이야기하며 자료화면으로 넘어갔다. 내 시구는 그렇게 전설로만 남았다. 진짜다. 아, 그리고 NC는 그날 졌다.
풀스택 개발자로의 NC SOFT 정복기 ⛳️
NC SOFT에 입사한 지 만 3년을 두 달 앞둔 8월 초, 풀스택 포지션으로 개발에 참여한 통합 협업 플랫폼 ‘ON AIR’가 런칭되었다. 풀스택 개발자로 전직한 뒤 처음 참여한 프로젝트이기도 하고, 이제까지 경험했던 프로젝트 중 가장 호흡이 길기도 해서 런칭 경험이 특히 새로웠다. 프로젝트 과정 중에서 Spring과 Quarkus를 처음 사용해 보고, 한 번쯤 꼭 해보고 싶던 A-Z 개발도 해봤다. 기획서를 받고 직접 구성을 설계해서 DB 테이블도 만들고, API도 설계하고, 연동도 하고, 화면까지 그려서 디자인 요구사항까지 적용하는 일. 리포트나 대시보드 같은 기능은 Backend가 힘들었고, 인터랙션이 많은 칸반뷰는 Front가 더 힘들었다. 그런데 모든 게 힘들었던 만큼 정말 매 순간이 즐겁게 느껴졌다. 특히 리포트의 통계 API를 만들 때 요구사항이 너무 까다로워서 많이 괴로워했는데, 오히려 그 과정에서 개발이 천직임을 다시금 느끼기도 했다. 퇴근하는 것보다 야근하는 것이 더 즐겁게 느껴지는 경험도 정말 오랜만이었으니까.
런칭하면서 다양한 동료 기획자와 개발자, 디자이너와 함께했고, 기억에 남은 동료들도 특히 많다. 우선 10년 경력 중 가장 멋진 기획자이자 PM이자 PO를 만났다. 협업 플랫폼을 기획하는 기획자인 만큼 프로젝트를 매니징하는 실력 또한 정말 나이스했다. 덕분에 페르소나를 정의하고 요구사항을 수집하는 과정부터 개발 이후 FGT진행까지 함께 참여하고, 실리콘밸리에 온 것처럼 여러 가지 개발 방법론도 사용해 보고 적용해 봤다.
그리고 동료 개발자분들에게도 본받을 점을 많이 느꼈다. 업무가 기능 단위로 분리되어 있다 보니 개발자끼리는 협업할 포인트가 많이 없었는데도, 늘 먼저 신경 써주고 도와주려고 하는 동료들이 있었다. ‘함께 일하고 싶은 동료’란 ‘일 잘하는 동료’ 정도로만 생각했었는데, NC에서 만난 개발자 아저씨들(?) 덕분에 조금은 다른 시각을 갖게 되었다. 난 정말 3년 내내 받기만 했는데도 떠날 때 미안해하시더라. 이토록 좋은 동료들을 만났음에 참 감사했다.
희망퇴직과 권고사직 그 사이 ☔️
프로젝트 런칭 후 무릎 수술로 인한 휴직이 끝나고 10월에 복직하고 나니 복직 이틀 차에 갑자기 온갖 기사와 함께 전사 공지가 떴다. “희망퇴직 프로그램 진행”. 갑자기 수 많은 부서가 없어지고, 파편화되고, 분사되고, 합병되었다.
여기서 포인트는 내가 무릎 수술 전, 부서를 이동해놓고 휴직했다는 것이다. 복직하고 나니 3년간 몸담았던 조직은 희망퇴직 프로그램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내가 새로 이동한 조직은 희망퇴직 대상팀이 아니었다. 위로금과 잔류를 고민하는 전 팀원들과 대화하면서도, 서로가 서로에게 섣불리 위로나 부러움을 건네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분사 이슈가 겹치며 살얼음판을 걷는 회사 분위기 속에서 그나마 위로금을 받고 퇴직하는 사람이 승자인 것처럼 기조가 흘러가기 시작했는데, 그러다 모든 조직에 희망퇴직과 동일한 위로금 조건으로 권고사직 할당량이 추가로 떨어졌다. 사실 난 작년 평가 등급이 매우 좋은 편이어서 기대를 안 하고 있었으나, 감사하게도 직속 실장님은 휴직자와 업무 미 배치자를 대상으로 우선 면담을 시행하며 나도 대상자가 되었다. 선착순처럼 사직서가 수리되며 블라인드에는 ‘실장이 친한 사람들에게만 권고사직 기회를 줬다’는 모순되고도 웃긴 썰이 돌기도 했는데, 심지어 나 또한 팀장님에게 비슷한 질문을 받았었다. 런칭>팀 이동>휴직>위로금>퇴직이 미리 계획한 것처럼 순서대로 잘 이루어져서, 나로서는 런칭과 동시에 무릎 수술까지 끝낸 뒤 큰 위로금을 받고 NC SOFT를 떠나게 되는 최고의 기회였다. 아, 덤으로 실업급여도 받았다.
청소년 코딩 교육 재능 기부 📚
회사를 그만둔 덕에 매년 연말에 하던 재능 기부에 올해는 더 많은 시간을 쓸 수 있게 되었다. 12월,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내가 직접 워크샵을 기획할 기회가 주어졌는데, 막상 직접 기획하려 보니 어려움이 많았다.
기획 단계에서 의도한 가장 큰 포인트는 ‘창의성’이었다. 코딩을 떠나 ‘직접 만드는 경험’의 즐거움을 느꼈으면 싶었고, 그 과정에서 창의적인 결과물이 나오길 원했다. PPT를 따라 코딩하며 모두가 똑같은 결과물을 만드는 ‘수업’을 진행하고 싶지 않았을뿐더러 그 과정이 재밌기 어렵다는 것도 잘 안다. 그리고 ‘실패’하는 경험이 없었으면 했다.
가장 어려운 건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2시간 동안 진행해야 하다 보니, 흥미를 이끌만한 주제여야 하면서도 집중을 유지할 수 있도록 워크샵을 구성해야 했다. 그리고 어떤 학생들은 아직 저학년이거나 코딩에 대한 지식이 적었으나, 어떤 학생들은 이미 게임까지 개발했다는 학생들도 있었기 때문에 코딩을 처음 해보는 학생도, 많이 해본 학생도 즐겁게 참여할 수 있는 워크샵이어야 했다. 이 모든 학생을 대상으로 분반 없이 워크샵을 진행해야하는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점점 더 욕심이 생겼다. 이 공들인 기획을 학생들이 알아주었을지 모르겠으나, 자정 정각에 시작된 참가 신청 접수가 1분 만에 마감되었다는 담당자분의 연락을 받고는 참 기뻤다.
내가 기획하고 진행한 워크샵의 이름은 ‘코딩으로 나만의 패턴 만들기’. 스크래치를 활용해서 반복문과 좌표 개념을 익히고 본인이 직접 그린 패턴으로 또 다른 패턴을 만드는 과정이었다. 다행히 워크샵은 성공적으로 잘 끝났고, 걱정했던 게 무색하게 학생들의 집중도도 매우 좋았다. 기획이란 게 참으로 어렵기도 했으나, 흔히 접할 수 있는 통일화된 코딩 교육이 아닌 신선하고 양질의 컨텐츠를 제공하고 싶은 염원대로 학생들이 잘 즐겨준 것 같아서 기쁘고 보람차고 행복한 과정이었다.
Advanced Open Water Diver, 스쿠버 다이빙 🤿
퇴사 후 더 즐길 수 있게 된 것 중 하나는 스쿠버다이빙이다. 취미로 프리다이빙을 즐기며 해외 포인트를 나갈 때 아쉬워서라도 꼭 스쿠버다이빙을 한 번씩 하는데, 자격증이 없다 보니 현지 마스터 손에 들려 다니는 게 아쉬웠다. 그래서 올해 8월 보홀 여행 직전, 한국에서 스쿠버다이빙 OW(Open Water) 자격증을 취득했다. 보홀에서 고래상어와 같이 헤엄도 치고, 국내 바다도 다니며 고성과 울릉도의 조류를 온몸으로 느끼고 왔다.
그리고 OW를 취득한 지 3개월 만인 11월, 더 상위 레벨인 AOW(Advanced Open Water)까지 취득하게 됐다. OW는 수심 18M까지만 잠수할 수 있는데, AOW가 있으면 더 깊은 포인트나 난파선, 동굴 같은 지형 다이빙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취득 과정에서 SMB 사용하는 법도 배우고, 난파선 다이빙, 야간 다이빙, 나침반, 완벽 부력, 딥 다이빙 스페셜티까지 수료했다. 로그북도 열심히 쓰다 보니 벌써 25 로그가 되었다. 바다에 25번 입수했다는 뜻이다. 60 로그를 채우고 나면, 다이빙 마스터 과정에 도전하고 싶은 욕심이 있다.
내가 즐긴 모든 것들: F45, 스노우보드, 프리다이빙, 야구, 뮤지컬, 전시회, 베이킹, 춤, 베이스, 그리고 해리포터 ⚡️
작년에 이어 올해도 열심히 한 것들은 F45와 스노우보드, 프리다이빙, 그리고 야구 관람. 올해는 어쩐지 기회가 좋아서 스카이박스석도 3번이나 다녀왔다. 그리고 올해 더 열심히 한 것들은 ‘혼자서 하기’. 혼자서 뮤지컬도, 전시회도 참 많이 보러 다녔다. 주변에는 이런 취미를 같이 즐길 사람이 없어서 늘 구인하고 다녔는데, 이젠 혼자서도 씩씩하게 잘 놀러 다니는 업그레이드 E가 되었다.
새롭게 배우기 시작한 것들도 있는데, 베이킹이랑 춤을 잠시 찍먹했다. 베이킹은 집에 장비를 들여놓을 용기까진 안 나서 동호회를 통해 요리학원을 갔고, 소금빵이나 휘낭시에, 스콘, 다쿠아즈 같은 것들을 만들었다. 춤은 어느 순간 갑자기 꽂혀서 댄스 학원에 갔는데, 르세라핌 안무를 배우다가 지쳐서 바로 포기했다. 나름 열심히 운동 한다 생각했는데 안 쓰는 근육을 쓰다 보니 단순히 몸 푸는 걸로도 근육통이 왔다. 😂 그리고 베이스 기타도 배웠다. ‘내일은 탑 밴드’라는 초보 밴드에서 나름 합주도 여러번 했다. 밴드에 관심을 가지다보니 페스티벌도 다녔다. DMZ 피스트레인도 가고, 인천 펜타포트도 갔다.
아쉬운 게 있다면 올해는 책을 몇 권 못 읽었는데, 그래도 목표했던 해리포터 시리즈 전권 완독은 이뤄냈다. 어릴 땐 책을 읽고 영화를 보는 것이 관례였는데, 하필 한창 읽던 때가 마지막 편인 ‘죽음의 성물’이 출간되기 전이었다. 그때 시기를 놓친 바람에 책도 못 읽고 영화도 안 본 채로 10년을 혼자 해리포터의 결말을 모른 채로 지냈는데, 올해에서야 드디어 책도, 영화도 다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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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자 10년, 그리고 쿠팡으로 이직 🚀
올해는 내가 개발자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한 지 10년째 되는 해였다. 만 10주년 셀프 선물을 뭐로 할면 좋을지 고민이 많았는데, 희망퇴직 덕분에 스스로에게 여유를 준 것 같아서 나쁘지 않은 선물이었다. 시간과 금전적인 여유 덕분에 쉬면서 유럽 여행도 다녀왔다.
환승 이직만 해본 데다가 불경기라 재 취업 걱정도 많았지만, 어쩌다 보니 쿠팡 리쿠르터에게 연락이 와서 면접을 보게 되고 핏도 잘 맞아서 희망퇴직 접수 일주일 만에 다음 회사 결정이 완료됐다. 연봉도 많이 올리고, 처음으로 회사 주식도 받아봤다. (신기해!) 나중에 시간이 되면 10년에 걸친 개발자 회고록도 적어보고 싶다. 아, 그걸 내 2025년 목표로 세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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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며
내 인생은 내가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서른이 다 되어도 매년 새로운 이벤트가 생기는 걸 보면 실은 아직도 내 인생을 잘 모르나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계속 삶을 영위하는 것 자체에 순간적인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가 겪는 모든 시행착오와 어려움이 결국은 소중한 경험과 성장의 기반이 되기를. ‘헤맨 만큼 나의 땅이 되기를’.